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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속 영웅 아이언맨·스파이더맨
21세기에도 되살려낸 '영화 덕후'

일러스트=전희성 기자 lenny80@hankyung.com

미국 영화 제작사 마블스튜디오의 새 영화 ‘캡틴 마블’이 북미와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국내에서도 개봉 6일 만에 3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주연을 맡은 브리 라슨에 대한 미스캐스팅 논란이 벌어진 데다 남성이 아니라 여성 히어로 영화여서 상대적으로 흥행에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대박을 터뜨렸다.

마블스튜디오는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해 11년간 가디언즈오브갤럭시, 어벤져스 등 20여 편의 영화로 170억달러(약 19조2000억원)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마블이 만든 영화 시리즈를 뜻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스타워즈와 해리포터 시리즈를 제치고 시대를 대표하는 상상 속 세계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케빈 파이기(46)는 2000년대 초반 영화 제작자로 마블에 합류해 2008년부터는 최고경영자(CEO)로서 마블스튜디오를 이끌고 있다. 그가 마블 히어로 제국을 세운 주인공이란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해 별세한 마블 만화 작가이자 편집자였던 스탠 리의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이 21세기 영화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파이기의 제작자 자질과 경영 능력 덕분이었다.

성공한 ‘영화 덕후’

마블스튜디오의 성공 비결은 이른바 ‘영화 덕후(영화광)’인 파이기 CEO가 빠르고 효율적이면서도 영화적 재미와 예술성까지 고려한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의사 결정 구조가 복잡한 다른 영화사들과 다른 점이다. 1973년생인 파이기는 또래 평범한 미국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인디애나존스’ 시리즈, 리처드 저메키스의 ‘백투더퓨처’ 시리즈와 같은 영화를 보며 꿈을 키웠다. 스타워즈를 만든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가 다녀 유명해진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화학과에 몇 차례 낙방한 끝에 입학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원작 만화가 있으니 좋은 캐릭터와 스토리만 고른 뒤 큰 자본을 투입하고 능력 있는 감독을 쓰면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되는 것 아니냐”고 그를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슈퍼 히어로의 대표격인 슈퍼맨과 배트맨 등 DC코믹스 캐릭터를 내세운 워너브러더스 영화가 잇달아 흥행에 실패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원작이 영화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워너브러더스의 DC엔터테인먼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다크나이트’ 3부작 이후 나온 영화들이 잇달아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으며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다. 그 뒤 제작한 원더우먼과 아쿠아맨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간신히 체면치레를 했을 뿐이다.

파이기 CEO는 2008년 제작비 200만달러로 아이언맨 1편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마약 복용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려 B급 배우 취급을 받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출연료 50만달러에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쪽대본으로 영화를 촬영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파이기 CEO는 큰 계획을 염두에 두고 얘기를 이끌어나갔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닉 퓨리(새뮤얼 L 잭슨)를 등장시켜 아이언맨의 세계가 다른 영웅이 속한 세계와 연결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외부 간섭에 필사적으로 저항

파이기 CEO는 어린이들이 흔히 상상하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성공시켰다. 그가 마블 히어로의 세계에 누구보다 해박한 데다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파이기 CEO는 이질적인 영웅들을 조화시키고 스토리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수차례 회의를 하고 오랜 시간을 투자했다. 그는 신의 아들인 ‘토르’, 외계인인 ‘타노스’ 같은 캐릭터들과 지구인 ‘캡틴아메리카’ ‘아이언맨’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조화롭게 배치했다. 반면 워너브러더스의 영화 배트맨vs슈퍼맨, 저스티스 리그는 이 같은 설정상의 문제를 소홀히 한 탓에 관객에게 혹평을 받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마블스튜디오는 모회사와 투자자의 간섭에도 끊임 없이 저항했다. 파이기 CEO는 영화를 제작할 때마다 아이작 펄머터 마블엔터테인먼트 회장과 다퉜다. 펄머터 회장은 뉴욕 브루클린 완구업체 중역 출신으로 비용 절감을 최우선 순위로 고려하는 경영자였다. 아이언맨 1편의 조연 제임스 로드 중령을 연기한 테렌스 하워드가 속편에서 인상된 출연료를 요구하자 “어차피 흑인은 다 비슷하게 생겨서 사람들이 못 알아본다”며 배우를 교체했을 정도다. 영화 시빌워를 제작할 땐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몸값이 비싸니 아이언맨을 빼자고 주장했지만, 파이기 CEO는 차라리 그만두겠다며 이를 거부했다.

마블엔터테인먼트가 2009년 월트디즈니에 인수된 후 파이기 CEO는 로버트 아이거 디즈니 회장에게 펄머터 회장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2015년 그룹 조직 개편에서 마블스튜디오는 마블엔터테인먼트에서 독립해 디즈니 직속 자회사로 승격됐다.

PC코드 지키면서도 ‘흥행 대박’

펄머터 회장의 손에서 벗어난 후엔 디즈니의 개입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파이기 CEO는 디즈니의 영향으로 히어로 영화가 아동 취향 영화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불식시켰다. 디즈니는 전통적으로 폭력물과 선정적 콘텐츠를 꺼린다. 마블스튜디오는 타협하지 않았고 2016년엔 유혈이 낭자한 19세 이상 관람 가능 영화인 데드풀을 내놓기도 했다. 마블스튜디오가 디즈니 재정에 크게 기여한 점도 영화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마블스튜디오는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 코드’ 함정도 피했다. 일부 영화팬들은 디즈니가 무리하게 여성과 유색인종 위주의 캐스팅을 강요하고 스토리를 변형시킨다고 비판하고 있다. 스타워즈 제작사 루카스필름이 2012년 디즈니에 인수된 후 나온 스타워즈 에피소드 7편과 8편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여성과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동양인 조연을 출연시키는 등 이른바 PC코드에 충실했다.

하지만 영화를 본 스타워즈 광팬들은 허술한 스토리와 형편없는 흡인력에 충격받았다. 팬들의 이탈로 가장 최근에 나온 스타워즈 스핀오프(파생) 작품 ‘한 솔로’는 흥행에서 참패했다.

반면 마블스튜디오는 PC코드를 지키면서도 영화의 재미와 팬들의 지지를 잃지 않았다. 마블스튜디오는 지난해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 대부분이 흑인으로 구성된 ‘블랙팬서’를 선보여 세계 극장에서 13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미국과 한국 등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미국 인종문제까지 다루면서 호평을 받았다. 최근 개봉한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 역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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