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최악 시나리오 현실화"

"판결 불확실성 해소 안되고 기업 부담은 고려 안한 판단"
원고 2만7000여명·지급액 1兆…기아차 2심 선고에 영향줄 듯
1·2심 승소했던 기업들도 우려…추가 인건비 부담 10兆 웃돌수도
“망하기 직전 기업이 아니면 통상임금을 소급해 지급하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앞으로는 무조건 회사 측(피고)이 지겠어요.”

통상임금 소급 적용과 관련해 소송 중인 A기업 법무담당 임원의 말이다. 그는 대법원이 14일 ‘신의성실의 원칙’을 엄격하고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업들은 이 판결에 대해 “기업 부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라는 반응을 내놨다. 앞으로 예정된 관련 소송에서 기업들이 줄줄이 패소하면 추가 인건비 부담이 10조원을 웃돌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재계 “설마 하던 일이 현실로”

경제계 관계자들은 이날 대법원 판결에 대해 한목소리로 “기업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됐다”고 평가했다. 경영상 위기 때는 통상임금 미지급분을 소급해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의성실 원칙을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인 기준은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인천 시영운수 소속 버스기사 22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근로자들에게 돌려줘야 할 수당이 4억원 수준인데, 이는 연매출의 2~4%에 불과하기 때문에 충분히 지급할 여력이 있다는 게 판결 근거다. 그러면서 신의성실 원칙을 신중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새 기준을 내놨다.

한 대기업 법무팀장은 “소급해 지급해야 할 수당 규모를 영업이익과 순이익이 아니라 매출을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는 건 기업이 적자를 내더라도 통상임금 미지급분은 돌려줘야 한다는 메시지로 읽힌다”고 말했다. 이어 “신의성실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기준까지 추가해 사실상 신의성실 원칙을 무력화했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수치로 나타나는 경영성과로만 지급 여력 여부를 판단하기보다 해당 기업의 미래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하는데, 이번 판결에 이런 부분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게 아쉽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대법원이 당초 예상을 깨고 신의성실 원칙 적용 기준을 명확하게 하지 않은 점에 관한 비판도 쏟아졌다. 추광호 한국경제연구원 일자리전략실장은 “이번 판결에서도 신의성실 원칙을 적용할 수 있는 ‘경영상 위기’가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다”며 “통상임금과 관련한 소모적인 논쟁과 법적 다툼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통상임금에 대한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리는 사례가 많아 기업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도 대법원이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문제라는 지적이다. 김영완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정책본부장은 “재판부가 사안마다 각각 다른 판결을 하면 경영 불확실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하루빨리 뚜렷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重·금호타이어 등 판결 뒤집어지나

경제계는 이날 대법원 판결이 법원에 계류돼 있는 소송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당장 기아자동차 통상임금 소송 2심 선고가 오는 22일 이뤄진다. 기아차 근로자 2만7000여 명은 2011년 회사를 상대로 통상임금 미지급분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17년 원고(근로자) 승소 판결을 내렸다. 기아차는 그해 3분기 9777억원의 충당금을 쌓았고, 그 결과 4270억원 규모의 적자를 냈다. 재계 관계자는 “1심에서도 원고가 승소한 마당에 이날 대법원 판결까지 더해지면서 2심에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은 극히 낮아졌다”고 했다.

1심 또는 2심에서 승소한 기업들도 크게 당황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아시아나항공, 현대미포조선, 금호타이어, 두산인프라코어 등이 대표적이다. 재계에서는 기업들이 막대한 비용 부담을 떠안을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한경연은 2017년 종업원 450인 이상 기업 중 통상임금 소송을 하고 있는 35개 기업이 모두 지면 총 8조3673억원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한경연 관계자는 “종업원 450인 미만 기업까지 더하면 전체적인 기업 부담이 10조원을 웃돌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경제계 관계자는 “올해 기업들은 경기침체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등 각종 악재와 싸워야 하는 상황인데 통상임금 소급 폭탄까지 떠안게 됐다”고 지적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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