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논설위원

“역사는 똑같이 반복되진 않지만, 그 흐름은 되풀이된다”(마크 트웨인)는 말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 지난 10일 영국 런던에서 연출됐다.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와 일본 아베 신조 총리는 활짝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1만㎞ 떨어진 두 섬나라가 경제뿐 아니라 안보 분야까지 긴밀한 협력을 약속한 게 예사롭지 않다.

자연스레 117년 전 영·일 동맹을 떠올리게 된다. 두 나라는 공통의 적인 러시아를 저지하는 데 의기투합해 1902년 동맹을 맺었다. 당시 패권국인 영국이 갓 근대화한 신흥국을 첫 파트너로 삼은 것은 이례적이었다. 이후 역사를 보면 일본의 외교적 승리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당시는 러시아가 남하하며 부동항 확보에 총력전을 펴던 때였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크림반도,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그레이트 게임’을 벌인 러시아를 막는 데 우군이 필요했다. 일본도 삼국간섭(요동반도 반환 압력), 동청철도(하얼빈철도) 부설 등 노골적인 야욕을 드러낸 러시아를 제압하는 데 영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예상을 뒤엎고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데는 영·일 동맹이 결정적이었다. 러시아가 최강 발틱함대를 파견하자, 수에즈 운하 통과를 저지한 게 영국이다. 일본 해군의 주력함도 모두 영국에서 건조된 것이었다. 발틱함대는 희망봉을 돌아 7개월을 항해하며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일본의 기습을 받아 힘도 못 쓰고 궤멸했다.

러·일 전쟁 이후 영국은 러시아라는 근심거리를 제거했고, 일본은 조선 지배를 보장받았다. 나라 밖 사정에 캄캄했던 조선은 청·일전쟁(1895) 이후 러시아에 기댔다가 망국에 이르렀다. 영·일 동맹이 상기시키는 쓰라린 역사다.

21세기에 경제규모 세계 3위(일본)와 5위(영국)의 ‘신(新)영·일 동맹’ 움직임이 주목된다. 수에즈 운하 반환(1967) 이후 아시아에 관심을 두지 않던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글로벌 파워’로 거듭난다는 전략이다. 일본은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자국 우선주의에 대비해 영국을 경제·안보·외교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의도다.

더 넓게 보면 중국 러시아 등 대륙세력의 팽창에 대한 해양세력의 응전으로 볼 수 있다. 미국도 일본 호주 인도 영국을 잇는 해양세력 대연합을 구상 중이다. 100여 년 전처럼 국제 세력균형에 엄청난 변화가 일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은 국제정세에 깜깜이라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시야는 한반도에 갇혀 있다. 동맹인 일본과는 철천지 원수가 될 판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국제정세에 눈 멀어 망국에 이른 한 세기 전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ohk@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