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위기를 기회로 - 창업 기업인의 꿈과 도전
(8) 윤성태 휴온스글로벌 부회장

18년 만에 매출 25배…글로벌 제약사로 '제2 창업'

50개국 수출 '한국 대표 헬스케어업체' 키운 비결
전화위복 - 약품사고 계기로 품질경영…美서도 인정
10년째 부회장 - 실무 챙기고 직접 발로 뛰며 시장 개척
1호 임상맨 - 모든 제품 스스로 체험하는 '솔선수범'

“화성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1998년 3월5일 윤성태 휴온스글로벌 부회장(55·당시 광명약품공업 사장)은 화성공장 화재 소식을 전한 직원 전화를 받고 털썩 주저앉았다. 대장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 지 1년 만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한 뒤 한국IBM에 다니던 그는 1992년 부친 윤명용 사장이 경영하던 광명약품공업에 입사했다. 그때부터 시련의 연속이었다. 입사 이듬해 가동을 시작한 화성공장이 화근이었다. 경기 화성 향남산업단지에 들어선 이 공장 건설에 60억원이 투입됐다. 연 매출과 맞먹는 큰 액수였다. 자금이 부족해 사채에 손을 벌렸다. 한 달 이자만 6000만~7000만원 나갔다. 설상가상으로 외환위기까지 닥쳤다. 화성공장까지 잿더미가 되자 윤 부회장은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며 절망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그를 일으켜세운 것은 절박함이었다. “회사를 팔아도 제값을 받기 어려웠죠. 부친이 평생을 바친 회사를 포기하면 당장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처지였어요. 그저 버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공장화재·자금난·위환위기 딛고 재창업

암흑 같은 상황에도 빛은 있었다. 담보 대출 조건으로 가입한 화재보험이 구세주였다. 보험금으로 급한 사채부터 막았다. 직원 78명에게 편지도 썼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함께 이겨내자”고 설득했다. 직원들이 한마음이 됐다. ‘회사를 살리자’며 함께 뛰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다시 공장이 돌아갔다.

윤 부회장은 1999년 광명약품공업을 광명제약으로 재창업하고 새출발했다. 18년 만인 2017년 매출 3254억원의 휴온스글로벌로 성장했다. 윤 부회장이 경영을 맡은 뒤 매출이 25배 넘게 늘었다. 78명이던 직원은 1400여 명이 됐다. 주사제, 인공눈물 등 300여 개 제품을 세계 50개국에 수출하는 국내 대표 헬스케어 그룹으로 발돋움했다.

파산 위기까지 내몰린 경험은 윤 부회장이 재무상태를 경영의 최우선 잣대로 삼는 원칙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2009년 520억원을 들여 충북 제천공장을 세울 때다. 2002년 무렵 공장을 새로 지어야겠다는 판단이 섰지만 결심이 쉽지 않았다. 건설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자칫 화성공장 악몽이 재연될까 걱정도 됐다. 꿈 속에서도 고민할 정도였다. 그렇게 찾은 해법이 상장이었다. “2006년 상장으로 자금을 마련해 이듬해 공장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한 해 매출보다 많은 비용을 들여 공장을 짓겠다고 했을 때 남들은 다들 무모하다고 했지만 결국 은행 대출에만 의존하지 않고 공장을 건설할 수 있었죠.”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사업을 키우면서도 부채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 재무구조에 각별히 신경 쓰기 때문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 그룹 전체 부채비율은 20.1%에 불과하다. 자산은 6390억원을 넘지만 부채는 1100억원밖에 안 된다.

‘작은 발견’이 열어준 돌파구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 윤 부회장의 세심한 경영스타일도 회사가 전환점을 맞을 때마다 빛을 발했다. 광명약품공업이 1999년 출시한 20mL 플라스틱 주사제가 대표적이다. 당시 국내 135위의 작은 제약사였던 광명약품공업은 차별화된 경쟁력이 없었다. 윤 부회장은 어차피 국내서 ‘원 오브 뎀(one of them)’밖에 안 될 것이라면 해외에서 승부를 보자고 결심했다. 화성공장이 재가동되자 그는 해외로 나갔다. 혼자 25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간 곳은 예멘이었다. 수출 상담을 하고 현지 의약품 시장을 둘러봤다. 그러다 우연히 20mL 용량의 독일제 플라스틱 주사제를 보게 됐다. 그 순간 ‘바로 이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 플라스틱 주사제는 500mL 이상 대용량 제품만 있을 때다. 20mL 제품은 모두 유리 앰풀에 들어 있어 용기가 깨지는 일이 많았다. 제조시설을 해외에서 들여오려 했지만 15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기계를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기술팀 직원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2억원을 들여 생산시설을 만들었다. 국내 첫 20mL 플라스틱 주사제를 시장에 내놨다. 반응은 뜨거웠다. 매달 50만 개씩 팔리며 한 해 매출이 120억원까지 올라갔다. “원가는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고 매출은 크게 늘었습니다. 2000년께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웰빙의약품 신시장을 열다

약을 생산하는 제약회사지만 의약품이 아니라 약을 담는 주사용기에 변화를 줘 얻은 첫 성과였다. 고용량 합성비타민C(아스코르빈산) 주사제의 성공도 비슷한 사례다. 매일 매출 장부를 살펴보다 아스코르빈산 주사제 매출이 눈에 띄었다. 매달 1000만원씩 팔리던 제품 매출이 1500만원까지 늘었다. 일산의 한 병원에서 사용량이 급증하면서다. 윤 부회장은 직접 그 병원을 찾아갔다. 미국 연수를 다녀온 한 호스피스내과 교수가 말기암 환자 치료를 위해 저용량 아스코르빈산 주사제를 한 번에 50개씩 처방했다. 말기암 환자는 체내 비타민C 농도가 부족해 외부에서 공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윤 부회장은 용량이 큰 제품을 팔면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곧바로 10g짜리 고용량 제품을 생산했다.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다. 공장을 쉬지 않고 가동해도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각종 학회 행사장에서도 사업 아이템을 찾아냈다. 다른 제약사에서 홍보하기 위해 가져온 비만치료제, 비타민B 등을 보고 2002년 ‘웰빙의약품’에 승부를 걸어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냈다. 2000년대 초반 매출이 30%씩 증가했다. 윤 부회장은 “대부분 제약사들이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전문의약품에 집중할 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비급여 웰빙의약품으로 눈을 돌린 것이 사업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세계적 헬스케어 강자가 목표”

사업이 안정기에 들어서고도 위기는 수시로 찾아왔다. 2002년 한 직원의 실수로 염화칼슘이 수액제에 잘못 혼입되는 사고가 터졌다. 다행히 환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품질경영에 힘쓰는 계기가 됐다. 이후 윤 부회장은 휴온스의 1호 임상맨이 됐다. 모든 제품을 스스로 체험해본다. 품질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품질만큼은 자신 있는 회사를 만들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윤 부회장은 1997년 대표를 맡은 지 20여 년 지났지만 여전히 현장을 챙긴다. 현장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2009년 휴온스 부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10년째 부회장직을 고수하고 있다. 부회장 타이틀이 실무를 챙기며 빠른 결정을 하는 데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저 스스로 항상 솔선수범하고 디테일을 꿰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회장은 뒤로 물러나 있는 것 같잖아요. 부회장이 실무를 하는 데 더 유리한 측면도 있어요. 아직 매출 1조원도 넘지 못했고….” 윤 부회장은 2020년 매출 1조원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최종 목표는 휴온스글로벌을 세계적 헬스케어 기업으로 키우는 것이다.

■약력

△1964년 충남 아산 출생
△1987년 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1989년 한국IBM 입사
△1992년 광명약품공업 입사
△1997년 광명약품공업 대표
△1999년 광명제약 설립(재창업)
△2003년 휴온스로 사명 변경
△2009년 휴온스글로벌 부회장
△2016년 3000만불 수출탑 수상


글=이지현 기자 / 사진=김영우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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