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9> 전남 해남 임하도

섬의 형태는 마치 '두 개의 말' 같아
미황사 전설 살아 숨쉬고
17.5㎞ 달마고도 인상적

푸릇푸릇한 채소 많고 기후 따뜻
싱싱한 보리 숭어, 싼값에 맛봐

겨울에도 푸르디 푸른 해남의 마늘밭.

해남은 다도해 바다와 연해 있지만 섬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모두 60여 개의 섬이 있는데 유인도가 7개, 나머지는 무인도다. 오늘은 임하도로 향한다. 임하도는 해남군 문내면의 섬이다. 0.343㎢의 면적에 주민 93명이 사는 작은 섬. 동서 두 개의 섬이 서로 연결돼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육지에 가까운 섬을 안 섬, 먼 섬을 바깥 섬이라고 한다. 지금은 두 섬 모두 육지와 연결돼 섬 아닌 섬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에 기대어 살아간다. 김, 미역과 전복양식 등이 생계를 이어준다. 주민들은 고추와 마늘 등의 농사도 겸한다. 섬은 느릿느릿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다.

김·전복양식…겨울 밀치의 맛 일품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면 서울을 비롯한 내륙 지방 사람들은 전국이 다 추위에 얼어붙은 줄 안다. 하지만 남쪽 지방은 사뭇 다르다. 남녘의 들판에는 노지 배추와 무와 시금치와 마늘과 대파가 자란다. 그 여리디여린 상추마저 노지에서 시들지 않고 자란다. 겨울 임하도의 밭에도 온갖 채소들이 푸릇푸릇하다. 바람만 거세지 않다면 어떤 날은 서울이 영하 10도일 때 남쪽의 섬들은 영상이다. 무려 10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에는 주저 없이 남방으로 떠나야 한다.

임하도에는 1770년께 하동 정씨와 김해 김씨가 배를 타고 지나가던 중 큰 파도를 피해 섬에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임하도(臨下島)는 ‘이마도(二馬島)’, ‘임하도(林下島)’로도 불리는데, ‘이마도(二馬島)’란 이름은 섬의 형태가 두 개의 말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임하도(林下島)’는 민둥산이던 섬에 조림해 숲이 울창해지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도솔봉에 서면 아련히 펼쳐지는 해남의 들판과 섬들.

지금 임하도를 뭍과 연결해 주는 것은 2009년에 놓인 다리지만 원래는 다리가 아니었다. 1986년 육지와 임하도 사이에 방조제가 놓였었다. 조류의 소통을 아주 끊어버리는 방조제로 섬과 육지를 연결했던 것이다. 방조제가 생기자 퇴적물이 증가하면서 갯벌 생태계가 파괴됐다. 더 이상 김 양식도, 갯벌 어업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갯벌 생태계 복원을 위해 방조제를 철거하고 조류 소통이 가능한 다리가 다시 놓였다.

다리가 놓이고 조류 소통이 가능해지자 점차 갯벌도 복원되고 바다도 살아나기 시작했다. 근자에 영광의 상하낙월도와 장흥의 장재도 등이 같은 상황을 거치면서 방조제를 다리로 바꿨다. 무분별한 간척이나 제방 공사가 갯벌을 죽였던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갯벌 살리기가 일어나고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임하도 갯벌도 그 갯벌 복원의 귀중한 사례 중 하나다.

방조제를 철거하고 조류 소통이 가능한 다리가 놓인 뒤 되살아난 임하도 갯벌.

임하도에서는 과거에는 김 양식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1가구만 김 양식을 한다. 요즈음 임하도 또한 전복 양식이 대세다. 10여 가구가 전복 양식을 한다. 임하도 앞바다에는 전복을 키우는 가두리 구조물이 떠 있고 육상의 수조에서는 전복 종묘인 치패가 자란다. 몇몇 가구에서는 작은 어선으로 물고기들을 잡는데 그중 숭어는 임하도의 명물로 소문나 있다. 임하도는 진도와 해남 사이 해협인 울돌목을 통과한 숭어가 남해로 이동하는 길목에 있어서 늦봄에 가면 배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보리 숭어들을 아주 싼값에 얻을 수 있다. 숭어는 워낙에 부르는 이름이 많지만 표준명은 두 개다. ‘숭어’와 ‘가숭어’. 숭어는 체형이 통통한 편이고 가숭어는 날씬한 편이다. 눈동자 주위를 노란 줄이 감싸고 있는 가숭어는 봄철에 알을 낳기 때문에 살이 오른 겨울에 맛있다. 통영지역에서는 이를 밀치라 부르는데 겨울 밀치의 맛은 감성돔 못지않다.

말릴수록 맛이 깊어지는 숭어찜.

하지만 숭어는 겨울에 산란을 하는 까닭에 산란 직후에는 맛이 없고 다시 살이 찌기 시작하는 늦봄부터 맛이 좋다. 그 무렵이 보리가 노랗게 익어가는 철이라 이때 잡히는 숭어를 보리숭어라 부른다. 울돌목을 지나온 맛 좋은 보리 숭어가 임하도 바다 앞에서 많이 난다. 또 이 무렵에는 임하도에서 그 숭어 떼를 쫓는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떼를 관찰할 수도 있다. 임하도의 또 하나 명물은 앞여 일몰이다. 11월부터 1월 사이에 해가 임하도 앞 바다의 무인도인 앞여 위로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의 출사 명소다. 이 겨울 한복판, 남쪽으로 떠나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미황사의 전설이 궁금하다면…

임하도를 품고 있는 해남은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미황사(美黃寺)는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다.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러 다가갔지만 배는 자꾸만 멀어져 갈 뿐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義照)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재계하고 동네 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라 정박했다. 배에서는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는데 갑자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 검은 소는 순식간에 큰 소로 변했다.

보물947호 미황사 대웅전.

그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꿨는데 금인이 이르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인데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 불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물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 하는 것이었다.

의조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누웠다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의조화상은 처음 소가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 따온 것이고 금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겨울에 피어야 진짜 동백이다.

미황사 부도전 부근에 세워진 사적비의 창건설화다. 숙종 18년(1692), 당시 병조 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었다. 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흡사하다. 억불의 시대였던 조선 중기까지도 미황사의 사세는 컸다. 임진왜란 후 서산대사의 제자들이 대둔사와 미황사로 내려오면서 미황사는 12암자를 거느린 대찰이 됐다. 하지만 150년 전 미황사 스님 40여 명이 배를 타고 섬 지방으로 시주를 받으러 나갔다가 풍랑에 뒤집혀 모두 죽음을 당한 뒤 미황사는 쇠락했다. 당시에는 중창 불사 등의 비용 마련을 위해 스님들이 군고(농악)패를 꾸려 마을들을 순회공연하며 시주를 받는 풍습이 있었다. 시주를 받으러 섬으로 가던 미황사 스님들이 풍랑을 만나 모두 수장됐던 것이다. 미황사 아래 서정리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당시 설쇠(타악기)를 맡은 스님이 어여쁜 여인의 유혹을 받는 꿈을 꾸고는 오늘은 떠나지 말자 했으나 주지스님이 듣지 않고 섬으로 출항을 강행해 일어난 참사라 전한다. 그래서 지금도 서정리 사람들은 비바람이 치는 을씨년스런 날씨를 두고 ‘미황사 스님들 군고 친다’고 말한다.

그 후 오랫동안 침체해 있던 미황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이는 1989년 미황사로 들어온 현공, 금강 스님 등이다. 미황사를 다시 남도 대표 사찰로 재건한 지금의 주지 금강 스님이 근래에 다시 한 번 중생들을 위해 크게 회향한 것이 달마고도 트레일 개통이다. 오늘은 달마고도 길을 걷는다. 미황사를 출발해 달마산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미황사로 돌아오는 달마고도 길은 금강 스님의 뜻에 따라 중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 손으로만 만들어졌다. 길을 낼 당시 매일 40~50명의 인부가 10개월 이상 달마산에 머물며 손으로 작업해 완성했다. 인공이면서도 전혀 인공의 티가 나지 않은 자연의 길. 17.5㎞의 이 둘레 길은 폭이 좁아 오가던 길손이 서로 간에 먼저 길을 비켜주는 겸손의 자세를 배우게 해준다. 달마고도는 길을 가는 내내 해남과 완도의 바다와 섬들을 보여주고 또 더 없이 고요한 숲 안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게 해준다.

도솔암에 이르는 풍경은 가히 천계의 모습

달마산 둘레를 따라 가는 달마고도 길은 높은 곳을 지향하지 않는다. 굳이 정상으로 인도하지도, 최고의 절경인 도솔암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그저 산 둘레를 돌며 평탄하게 길과 자신에게만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그네는 잠시 그 평화로운 길을 빠져 나와 샛길로 들어선다. 삼나무 숲 사이 가파르고 험한 도솔암 등산로를 오른다. 도솔암은 남도의 금강산이라 이르는 달마산 자락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바위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도솔봉 절벽 끝에 서 있다.

더없이 평탄한 달마고도 숲길.

도솔암에 도달하면 도솔천에 이를 수 있을까? 미륵이 사는 하늘 세상. 욕계 6천(欲界六天) 중 4천인 도솔천은 지족천(知足天), 묘족천(妙足天), 희족천(喜足天), 희락천(喜樂天) 등으로도 불리는 하늘 세상이다. 도솔천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이 있다. 도솔천 내원에는 장래 부처가 될 보살들이 산다. 석가도 현세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도솔천 내원에 머무르며 수행했다. 지금 내원에는 미륵보살이 살고 외원에는 천인들이 산다. 미륵보살은 내원에서 설법하며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 미륵이 하생하면 인간 세상은 그 자체로 이상 세계가 된다. 미륵의 교화를 받은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되고 열반에 든다고 미륵 신앙에서는 믿어진다. 그래서 원효 대사는 도솔천에서 왕생할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했고 백제의 무왕은 미륵보살이 인간의 세상에 하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익산 미륵사를 세웠다. 달마산 도솔봉 꼭대기에 도솔암을 지은 신라 시대 의상대사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도솔암은 어찌 저리 가파른 산정에 세워져 있을까? 본디 도솔천에 오르는 길이란 이토록 험난한 것인가?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야 이를 수 있는 천국. 도솔암에 이르러 펼쳐지는 풍경은 천계의 모습이다. 하지만 눈앞의 환상적인 풍경은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다. 도달했으나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도솔암이 보여주려는 것은 결코 도솔천이 아니다. 도솔천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허상이라는 깨우침이다. 어디에도 도솔천은 없다. 극락도, 지옥도 없다. 그저 지금 여기만 있을 뿐. 지금 여기에 도솔천도, 극락도, 지옥도 있다. 물론 있다는 것 또한 허상이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삶은 그래서 한바탕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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