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현 단일보험체계 테두리 안에서 혁신의료기술이 발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지훈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5일 서울 역삼동 GS타워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주최한 '혁신의료기술 규제혁신 심포지엄'에서 "모든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것과 혁신적인 의료기술을 빨리 도입하는 것은 양립할 수 없다"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제도를 조금 손질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건강보험의 목적은 더 많은 국민이 경제적 부담 없이 임상적 효과가 뛰어난 의료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혁신의료기술에 높은 수가를 책정하기 어려운 이유다. 정 교수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유지하되 소비자가 민간보험도 고를 수 있도록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그는 1990년대부터 국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증거 기반 의학'이 혁신의료기술 발전에 장애물이 되는 측면이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증거 기반 의학이란 의료기술이 임상적으로 안전하고 유효한지 확인하기 위해 대량의 자료를 축적한 뒤 이를 바탕으로 환자에게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정 교수는 "증거 기반 의학은 분명히 장점이 있다"면서도 "너무 많은 증거를 요구하기 때문에 혁신의료기술이 진입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의료진이 기존 기술에 의존하기 쉽다"고 했다. 또 "증거를 쌓느라 개발 기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수록 나중에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정부는 "건강보험의 가치와 혁신의료기술의 등장을 함께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중규 보건복지부 보험급여과장은 "건강보험은 연구개발 투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혁신의료기술을 살리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관점과 거리가 멀다"고 했다. 이어 "단일보험체계는 일단 구매하면 대량 구매자이지만 깐깐하게 판단하는 구매자"라며 "새로운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기술의 가치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혁신의료기술이 임상에서 활용되는 것을 불필요하게 지연시키지 않기 위해 다각도로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이 과장은 "신의료기술평가와 보험 등재 심사를 동시에 진행하고 체외진단기기의 경우 '선진입 후평가' 제도를 실시하는 등 불합리한 절차와 불분명한 기준을 고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배성윤 인제대 교수는 "의료기기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부도 혁신 쪽으로 무게중심을 다소 옮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아직 업계에서는 규제가 많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말했다.

그는 "업체가 혁신의료기술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게 정부가 선별급여, 조건부 급여, 선진입 후평가 제도 등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며 "기회를 준 뒤 효과가 없으면 재평가를 통해 급여 항목에서 퇴출시키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건강보험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국민의 도덕적 해이를 해소하려면 질병 예방 관련 급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임유 기자 free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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