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캐스린 H 앤서니 지음 / 이재경 옮김
반니 / 452쪽│1만9800원

최근 남성들도 육아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늘 아내 몫으로만 여겨진 육아에 대한 부담을 함께 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편도 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둘러싼 환경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있다. 여자 화장실엔 있는 기저귀 교환대가 남자 화장실엔 없다. 아무리 의식 변화를 외쳐도, 또 의식에 변화가 생긴다 해도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결국 육아는 또 온전히 여성의 몫이 된다.

이뿐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제품, 살고 있는 마을, 통근하는 사무실 등 사물과 공간들의 설계나 디자인은 우리의 삶과 의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은 일상을 둘러싼 제품과 장소의 환경 디자인이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편견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개선 방안을 제안한다. 저자는 미국의 건축가 캐스린 H 앤서니다. 그는 2010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공중화장실의 성평등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기저귀 교환대 없는 남자 화장실뿐만 아니라 일상엔 차별과 편견을 내포한 환경 디자인이 많다. 치마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 계단, 왼손잡이는 쓰기 힘든 학교 책상과 각종 비품 등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디자인들은 젠더, 연령, 계층 등에 관한 편견을 교묘하게 조장한다. 저자는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디자인엔 생산자의 편향이 개입되게 된다”며 “이런 편향들은 단순히 사용 불편을 겪게 하는 것을 넘어 사회의 간극을 넓힌다”고 주장한다.
잘못된 디자인은 사용자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어린이 옷장과 TV는 툭하면 넘어진다. 한입에 쏙 들어가는 캡슐 세제는 아이가 삼키면 기도가 막힐 수 있다. 남성 운전자 체형에 맞춰 디자인된 자동차는 여성이나 평균 신장보다 작은 남성들의 자동차 사고를 유발한다. 유행에 맞춰 높아진 침대에선 노약자들이 다치기 쉽다.

단골 피해자는 평균보다 키가 작거나 뚱뚱한 성인, 여성, 어린이와 노약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이렇게 말했다. “공간은 이데올로기 및 정치와 동떨어진 과학적 사물이 아니다. 공간은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저자 역시 “세상은 이들을 위해선 설계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며 “이들은 하루하루 더 많은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면에서 점점 더 세분화·다각화되고 있다. 이젠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환경 디자인도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 편향을 줄이거나 없애는 디자인이 모두에게 기회가 균등한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인간의 다양성에 합당한 안전하고 건강한 디자인을 창조할 수 있다. 이제 ‘디자인’이란 명목으로 우리를 따돌리는 사물과 공간을 미래에서 퇴출할 때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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