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더멘털 이상 없다"는 정부

과거 '반도체 호황' 꺼지자 수출 곤두박질…경제위기 직면
1997년에도 지금처럼 경쟁력 약화로 車산업 기반 흔들려
투자·내수 침체 속 낙관론만…'경기 악화 경고음'은 묻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2년 유럽 재정위기…. 1990년대 이후 한국에 경제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매번 전조처럼 ‘반도체 착시’ 현상이 불거졌다. 반도체 가격이 고공행진을 벌였고 ‘호황이 장기간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 보고서가 쏟아졌다. 다른 수출산업이 침체되면서 전체 수출 중 반도체 비중이 많게는 20% 선을 넘나들었다. 그럼에도 경기 둔화 우려의 목소리는 묻혔다. 무역수지가 호조를 보였기 때문이다. 주가는 고공행진을 벌였다. 그러다가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골병이 든 한국 경제의 민낯이 나타났고 곧이어 경제위기가 뒤따랐다.

반도체 착시 현상은 올 들어 다시 불거지고 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심해졌다. 수출 중 반도체 비중은 20%를 웃돌며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다. 주력 제조업 중 그나마 반도체의 뒤를 좇는 산업은 고유가 덕에 선전하는 석유화학업종이 유일하다. 투자 침체, 소비 둔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반도체 독주가 1년째 이어지다 보니 우려가 점점 커지는 양상이다. 경쟁력 약화로 자동차산업 기반이 흔들린다는 점도 1997년 외환위기 직전과 닮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외국인들이 대거 국내 주식을 내다 팔며 불안을 키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신흥국 금융불안, 미·중 무역갈등, 유로존 경기불안 등 글로벌 악재들이 불거지는 가운데 반도체 경기마저 꺾인다면 국내 금융 시장은 과거 위기 수준의 충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그나마 재정건전성, 외환보유액, 신용등급 등이 양호할 때 한시라도 빨리 구조개혁을 통해 대응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2년째 ‘반도체 주도 성장’

30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국내 상위 30대 기업의 매출은 작년 같은 기간 대비 4.9%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31.2%, 투자는 34.4% 늘었다. 수치만 놓고 보면 국내 기업들은 상당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빼면 숫자는 확 달라진다. 매출은 0.7% 증가에 그치고 영업이익은 16.3% 감소했다. 투자는 20% 이상 줄었다.

정부가 경기 호조의 증거로 자주 내세우는 수출 증가율도 반도체를 빼면 힘에 부치는 게 역력하다. 지난달에는 수출이 8.2% 감소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16.2% 급감했다. 정부는 지난해 10월이었던 추석이 올해 9월로 앞당겨진 데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반도체 수출은 그 와중에도 전년 동기 대비 증가했다. 다른 업체들의 부진이 그만큼 더 심각하다는 얘기다.
◆증시, 금융위기 이후 최대 폭락

반도체 착시에 따른 수출 호조가 이어지는 동안 경기 지표들은 점점 불안해지고 있다. 건설투자, 설비투자 등은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 신규 취업자 수는 금융위기 이후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한국은행은 내년 성장률을 2.7%로 내다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6%, LG경제연구원은 2.5%를 전망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가 정점에 달한 2012년의 2.3%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이마저도 반도체 경기가 내년까지 호황을 이어갈 것이라는 전망을 전제로 한 것이다.

경제 지표가 흔들리고 대내외 여건의 불확실성이 커지자 금융시장의 불안은 확대되고 있다. 10월 코스피지수는 14.1% 폭락했다. 금융위기가 정점이던 2008년 10월 23.13%가 폭락한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외국인들이 이달 들어 4조원가량을 팔아치우며 시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투자 감소, 실적 악화, 금융시장 불안 등이 과거 경제위기 상황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경제 불안 곳곳으로 번진다.

정부가 ‘펀더멘털(기초체력) 이상 없다’고 주장하는 사이 민심 흐름에 민감한 여당 내부에서는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증시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미·중 간 무역 분쟁이 이제 막 시작됐는데 국내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예상보다 클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 원내대표는 “국내적으로도 기업 투자가 활발하지 못하고 여러 산업 구조조정이 묶여 있다”며 “예민한 문제라서 모두 말씀을 못 드리지만 경제상황에 대해서는 굉장히 긴장감을 갖고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고경봉/김형호 기자 kg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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