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가을, 제주에 서다

섬 전체가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인 최남단 섬 마라도는 2000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가을 제주는 우아한 갈색과 핑크빛 낭만에 젖어 있다. 가을바람에 몸을 누이는 억새와 울긋불긋 산을 물들인 단풍으로 인해 어느 계절보다 고즈넉하다. 두 눈을 감으며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게 해주는 가을 제주에는 어떤 것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사계절 내내 변함없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제주지만 가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억새와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 제주로 행복한 여행을 떠나보자.

핑크뮬리의 계절에 만나는 상효원

제주의 가을 명물 ‘핑크뮬리’

가을이 오면 제주에는 핑크뮬리가 이곳저곳에서 매력적으로 피어난다. 핑크뮬리는 줄기가 곧게 서고 마디에 털이 있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여름에는 푸른빛이었다가 가을에는 분홍빛으로 물들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이제 가을 하면 울긋불긋 단풍 명소 못지않게 전국 곳곳 핑크뮬리 명소를 찾는 이들 또한 넘쳐난다. 서귀포에 있는 노리매 공원과 휴애리는 제주 속 핑크뮬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공원 한편에 자리한 핑크뮬리 속에서 사진 찍는 가족이나 연인들이 넘쳐난다.

핑크뮬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은 서귀포시 돈내코에 있는 상효원이다. 16만5289㎡ 규모에 자연 그대로인 곶자왈과 계곡, 습지, 울창한 나무들로 이뤄진 숲, 바위, 돌 모든 것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수목원이다.

상효원은 11월4일까지 가을 축제가 이어진다. 가을을 상징하는 단풍나무는 물론 붉게 물든 핑크뮬리, 황홀한 향기를 품은 금목서, 은목서와 함께 메리골드 4만 그루를 새롭게 전시해 상효원을 찾는 관람객에게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꾸밀 예정이다. 그 외에 테라리엄 화분 만들기, 모스토피어리액자 만들기 등 가을 수목원에서만 느낄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한다. 상효원의 신기한 장소인 한라산 산신령 기운이 흐르는 상효동굴에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소원목 달기 체험 등으로 관람객에게 재미를 줄 예정이다.

매력적인 단풍 임실기암과 천아숲길

편하게 한라산 단풍을 감상할 수 있는 천아숲길

한라산은 한국에서 가장 늦게까지 단풍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북쪽에서 남쪽,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차차 내려가는 단풍 특성상 한라산에서는 11월 중순까지도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미처 단풍 산행을 가지 못해 아쉬운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곳이기도 하다.

한라산 단풍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영실기암이다. 영주십경의 하나인 영실은 병풍바위와 오백나한 등 기암괴석이 가득하다. 이와 어우러져 붉게 물든 모습이 한라산 단풍 중 최고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사실 등산하기 편한 영실코스보다는 관음사 코스 단풍이 절경이다. 삼각봉에서 백록담 북벽까지 무려 8.7㎞나 되는 긴 구간에 걸쳐 매력적인 단풍을 감상할 수 있다. 다만 길이 험하고 코스가 길어서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쉽지 않다. 조금 편하게 한라산 단풍을 감상하고 싶다면 한라산 둘레길 5개 중 하나인 ‘천아숲길’을 걸으면 된다. 천아수원지에서 돌오름까지 10.9㎞ 코스다. 숲길 초입부터 단풍 빛깔이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걸음을 옮길수록 붉은빛이 점점 짙어져 무수천 상류 계곡인 천아계곡에서 가을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5·16도로의 숲터널도 좋다. 붉게 물든 단풍이 터널을 이뤄 가을에 가장 멋있는 길이다. 이 밖에 사려니숲길도 단풍의 아름다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독특한 벽화가 그려진 바람코지

신천리 바람코지 벽화마을

전국에 벽화마을이 많지만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에 있는 바람코지는 특별한 벽화마을이다. 신천리는 ‘바람코지’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로 바람이 거센 해안마을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바람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가던 마을이 한 영화촬영지로 선정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촬영팀이 영화에 필요한 벽화를 그린 것을 계기로 젊은 예술가와 지역 화가들이 힘을 보태 작은 어촌마을에 오색 빛깔 생기를 불어넣었다. 말, 동백꽃, 그리고 만화 캐릭터와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그림들로 채워져 골목을 들어설 때마다 어떤 벽화로 채워져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벽화마을에서 가장 인상 깊은 그림은 무거운 해먹을 들고 바닷길을 걸어가는 해녀 모습이다. 제주 해녀의 신산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다. 성산일출봉 모습이 담겨 있는 벽화도 있다. 코끼리가 문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풍경을 담은 모습은 트릭아트의 한 장면 같다.

인스타의 핫플레이스 효명사 ‘비밀의 문’

우거진 숲, 얼기설기 엮인 나뭇잎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내린다. 그 아래로 드러나는 초록의 이끼들. 숲의 정령이 노니는 파란 카펫이 한라산 중턱, 작은 사찰 효명사 주위 곳곳에 깔려 있다. 큰 도로를 벗어나 우거진 숲속에 자리한 효명사 산신각을 지나 법당

옆길 계단을 내려가면 푸른 이끼가 덮인 아치형 문을 만날 수 있다. 돌계단부터 문 주위까지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한 문을 넘어서면 이곳이 현실일까, 천국일까 묘한 분위기가 밀려온다. 푸른 나무와 이끼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워 사람들은 ‘비밀의 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밀의 문은 소문을 타고 돌아 수많은 사람이 찾기 시작했다. 비밀의 문으로 나오면 바로 아래부터 계곡이 이어진다. 제주의 대표 계곡인 안덕계곡처럼 물줄기를 따라 계곡이 이어진다. 아직은 사람 발길이 많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장소. 이뿐만 아니라 효명사 마당 작은 연못과 산책로 주변 계곡이 아기자기해 숨은 한라산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

해안절벽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마라도

한국 최남단 섬 마라도는 남제주군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30분 정도 가면 만날 수 있다. 마라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마을을 이루는 섬으로 원래 가파리에 속했으나 1981년 마라리로 분리됐다. 2000년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섬 모양은 길쭉한 고구마를 닮았다.

마라도 해안선 길이는 4.2㎞, 산책길의 공식 이름은 ‘마라로’다. 원래 원시림이 울창했던 섬이었으나 경작지를 얻고자 숲을 모두 불태웠다고 전한다. 화산 활동으로 용암이 분출해 형성된 마라도는 섬 전체가 거대한 현무암석 덩어리다. 섬 밖 해안선은 해식애가 발달해 동굴과 아름다운 기암괴석으로 이뤄졌다. 거센 제주의 파도가 깎아낸 유려한 해안절벽과 그 틈 속에서 기어코 뿌리 내린 선인장 군락, 마라도 주민의 섬살이 애환이 묻어나는 할망당, 그리고 하늘과 맞닿을 듯 솟은 등대와 고즈넉한 성당까지. 어느새 마음에 부는 거센 바람은 가라앉고 평온이 자리한다. 마라도는 10월20일~11월4일 가을여행주간에 일출, 일몰, 별빛체험, 버스킹 공연 등을 마련했다.

구실잣밤나무길과 아끈다랑쉬오름의 절경

억새로 가득찬 아끈다랑쉬오름

제주시 구좌읍 덕천리의 구실잣밤나무가 드리운 길은 가을 햇살이 비추는 선명한 세계와는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맑은 초록빛의 숲이 아니다. 나무 밑동 낮은 곳에서 양옆으로 뻗은 가지들과 짙고 어두운 초록의 잎이 이룬 숲이 하늘을 가려 신비롭고 은밀한 공간을 연출한다. 자연이 빚은 초록숲 터널. 그 사이로 비껴드는 볕은 천상에서 내려온 한줄기 메시지인 듯 성스럽다. 상덕천삼거리를 중심으로 8자 모양을 그리는 덕천리의 ‘팔자 좋아 길’ 남쪽에 있는 숲터널은 길 가운데 숨어 있어 더욱 비밀스럽다. 터널을 지나 걷다 보면 억새밭, 연못, 오름과도 만난다. 구간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하는 이곳에서라면 길을 잃어도 좋겠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에 가려진 아끈다랑쉬오름은 다랑쉬오름에 딸린 야트막한 언덕으로, ‘작은’이란 뜻의 제주 말 ‘아끈’을 붙여 부른다. 5~10분이면 충분히 오르는데 정상에 서면 높은 곳에서 놓치기 쉬운 동쪽 제주의 진짜 모습이 펼쳐진다. 땅 모양새에 따라 구획한 밭의 경계, 다랑쉬오름을 비롯한 주변 오름과 마을의 전경,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까지. 오히려 시야를 좁히면 눈부신 제주의 모습이 꼼꼼하게 보인다. 특히 10월에는 억새로 가득 차 바람의 리듬에 몸을 맡긴 금빛 군무를 감상할 수 있어 더없이 좋다.

이호테우서 알작지까지 뻗은 해안도로

이호테우 해안부터 알작지까지 연결된 해안도로

제주 바다가 매력적인 이유는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바라봐도 하나도 같은 바다를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제주 신들의 손길은 얼마나 세심하기에 이 섬을 이토록 다채롭게 빚어낸 걸까. 제주와 만난 바다는 장소마다, 볼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숨겨졌던 새로운 뷰포인트가 열렸다. 이호테우 해안부터 알작지까지 해안도로가 뚫린 것이다. 올레꾼에게도 희소식이다. 이 부근을 지나는 올레 17코스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 해질녘, 푸른빛을 깊이 머금은 바다와 검은 몽돌이 내는 목소리, 그리고 지는 태양이 물들인 오색빛 하늘의 조화로 두 눈은 물론 귀까지 호사롭다.

제주=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

여행 메모

제주 밤바다를 본 적 있는가? 수평선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불빛들. 까만 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으로 은백색 갈치를 유혹하는 갈치잡이 배들이다. 제주 갈치는 주로 봄, 가을에 낚는데, ‘가실갈치’ 즉 가을에 잡히는 갈치를 최고로 친다. 제주 도민들은 예로부터 갈치와 가을철 늙은 호박을 함께 넣은 갈치호박국을 별미로 끓여 먹었는데 그 맛이 비리지 않고 시원하면서 달큰한 것이 특징. 갈치는 주로 구이나 조림으로 먹는데 산지에서만 즐길 수 있는 갈치회도 일품이다. 그 외에 갈치 외형을 그대로 살려 조리한 통갈치구이나 통갈치조림, 그리고 갈치조림에 왕갈비를 넣은 ‘갈갈조림’도 이색 갈치요리로 인기다. 통통하게 살 오른 갈치의 속살, 제주에서 다양하게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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