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24> 여수 월호도

글썽이 마을엔 불로초 캐러 온 ‘서불의 전설’이…

금오도와 개도, 자봉도 등 인근 섬들이 감싸고 있어 호수와 같은 월호도 앞바다.

월호도행 도선은 여수의 돌산 군내리항에서 뜨지만 오늘은 기관 정비 때문에 휴항이다. 더없이 푸른 하늘과 잔잔한 바다. 널빤지같이 작은 어선들도 쉽게 오가는데 월호도로 가는 길은 꼼짝없이 묶였다. 20분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정기 도선이 운항을 중단하자 뱃길이 끊긴 것이다. 기관 고장으로 정비에 들어갔다고 배 안 띄우면 그만인 정기 항로. 육지에서는 노선버스 안 다니면 다른 버스로 대체해 준다. 하지만 섬 주민들에게 그런 혜택은 없다. 섬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다른 선박이라도 투입해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섬은 여전히 차별받고 있다.

57가구 100여 명이 사는 월호도

오늘 꼭 섬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어서 돌산과 다리로 연결된 화태도 독정이항에서 대절선을 불렀다. 부둣가에서 배를 기다리는데 방파제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마치 인형극 같다. 역광 때문일 것이다. 사는 일이 뭐 그냥 한바탕 꼭두각시 인형극이긴 하다만! 실상 가까이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많다. 숲을 나와야 숲이 보이듯이. 삶의 진실이란 거리를 둬야 제대로 보이기도 한다.

월호도 마을 전경

대절선이 출발했다. 잘 가던 배가 멀리서 오는 배 한 척이 보이자 선수를 급히 돌려 화태도로 돌아간다. 해경 경비정 단속이 두려워서다. 단속선이 아니란 것이 확인되자 어선은 다시 출발해 순식간에 월호항에 닿는다. 헌법에는 이동의 자유가 보장돼 있지만 섬사람들은 이동의 자유도 없다.

월호도는 작은 섬이다. 주민등록상에는 77가구 1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어느 섬이나 그렇듯 실제 인구는 다르다. 57가구 100여 명이 살아간다. 섬은 비교적 젊은 편이다. 65세 이상이 55명, 65세 미만이 45명이다. 70대 이상이 태반인 섬도 많아 상대적으로 젊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7개 마을에 1000여 명이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 지나간 옛일이다.

달의 호수에 있는 학생 2명의 학교

월호, 달의 호수. 섬의 이름이 참 고즈넉하다. 섬 모양이 달처럼 둥글다 해서 월호도라 했다고 전한다. 월도, 대리도, 달도, 달섬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달과 연관된 지명이다. 달섬. 섬은 대체 어떤 달 모양일까. 만월일까, 반달일까, 초승달이나 그믐달일까. 섬이 보름달 모양이었으면 만월도라 했겠지. 초승달이었으면 미월도라 했겠지. 아마도 섬이 달섬이었던 것은 형태가 달 모양이 아니라 섬 앞바다에 비친 달이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을까. 달빛 바다가 호수 같아서가 아니었을까. 월호도 앞바다는 인근의 섬들 금오도, 개도, 자봉도, 화태도 등이 감싸고 있어 그대로 호수다. 큰 파도에도 안전한 호수.

비탈밭을 일구는 섬 주민. 월호도 비탈밭에선 주로 시호를 재배한다.

작은 섬이지만 월호도에는 아직도 학교가 있다. 학생 2명, 교사 1명인 섬마을 분교. 학생이 단 2명뿐이지만 폐교되지 않고 학교가 있다는 것은 섬에 희망이 있다는 증거다. 미취학 아동이 2명이 더 있으니 학교는 당분간 폐교 걱정은 없다. 학교가 있어야 젊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고향 섬에 돌아오고 싶어도 못 오는 이도 많다. 교육청은 자꾸 경제논리를 내세워 작은 학교를 폐교하려 들지만 교육을 경제논리만으로 따질 일은 아니다. 백년대계가 아닌가. 오히려 섬에는 작은 학교를 권장해야 맞다. 섬이라는 특수성을 인정해야 섬도 지속가능하다. 작아야 제대로 교육이 될 수 있다. 학생이 없을 때는 폐교가 아니라 휴교를 해야 한다. 학교를 없애기는 쉬워도 다시 세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부두에서 만난 윤근조 이장은 집배원 복장을 하고 있다. 이장이면서 집배원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포스티노’인 이장이 섬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여름에 좋아요. 겨울엔 너무 추워.” 섬은 북서쪽으로 마을이 들어 앉아 있어 겨울에는 북서풍을 직격탄으로 맞으니 춥다. 지난겨울에는 해안 전체에 고드름이 생길 정도였다.

1980년대 가두리양식 시작한 부자섬

월호도는 섬이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밭에서 일한다. 비탈밭을 일구는 할머니들이 자주 눈에 띈다. 밭에 주로 심는 것은 시호라 부르는 약초다. 간에 쌓여있는 울화를 풀어 없애주는, 화병에 명약으로 알려진 약초. 간에 생기는 염증인 간열증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한마디로 간에 좋은 약초다. 시호는 그 뿌리를 한약재로 사용한다. 꽃은 8~9월에 노란색으로 피는데 유채꽃과 비슷하다. 11월께 뿌리를 캐서 말린 뒤 약재상에 판다. 월호도 노인들은 1년에 600㎏ 정도의 시호 뿌리를 판매해 소득에 보탠다. 평지가 거의 없는 월호도의 밭은 대부분 비탈밭이라 경운기가 들어갈 수 없어 노인들이 직접 호미로 밭을 갈아서 시호를 재배하니 그 고단함이 크다.

오솔길을 따라 이어지는 글썽이 앞바다

월호도 사람들은 2000년대 전에는 가두리 양식을 많이 했다. 1980년대 여수에서 가장 먼저 가두리양식을 시작한 부자 섬이었다. 마을 입구의 창고 건물은 양식장 사료를 저장하던 사료 창고였지만 지금은 비어 있다. 대부분 가두리를 접었기 때문이다. 원인은 과잉 생산이었다. 양식업자가 많아지니 활어값은 떨어지는데 사료값은 자꾸 올라갔다. 20년 전에 농어 참돔 등 양식 어류가 ㎏당 2만원이었던 것이 지금은 8000원밖에 안 한다. 반면에 사료값은 10배 이상 상승했다. 지금 월호도 어민들은 대부분 어선 사업으로 전환했다. 30가구가 어선을 부린다. 가두리 양식은 두 가구뿐이다. 섬 주변의 다른 가두리들은 외지인에게 임대해준 것들이다. 어선들은 봄, 여름에는 도다리, 갑오징어를 주로 잡고 여름에는 갯장어(하모)를 많이 잡는다. 통발로 문어도 잡는다. 소득이 있으니 젊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저인망 어업 금지 후 바다 황폐화

섬은 작지만 숲이 좋다. 특히 섬의 첫 입도조인 윤씨 선산이 있는 곳의 잣밤나무 숲은 원시림처럼 잘 보존돼 있다. 이 숲을 도산수라 한다. 큰 마을 초입에 있지만 숲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땔감을 해서 연료로 쓰던 시절에는 쉽게 오갈 수 있었는데 이제는 잡목이 우거져서 발 디딜 틈이 없다. 개나리골짜기, 가마바구끄터리는 개지(키조개)가 많이 나는 탓에 외지 다이버들과 섬 주민들 간에 충돌이 잦은 곳이다. 동찌라고도 하는 동백포는 6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폐촌이 돼버렸다. 글썽이 마을도 11가구가 살다가 역시 폐촌이 되고 말았다. 저인망 어업(고대구리)을 금지시키면서 다들 떠났다.

섬들을 다닐 때마다 고대구리 조업 금지 때문에 바다가 더 황폐해졌다는 어민들의 주장을 자주 접한다. 물론 물고기가 더 많아졌다는 섬도 더러 있지만 아주 먼 남쪽바다 섬의 일부다. 대부분 섬은 고기가 씨가 말랐다고 하소연이다. 바닥까지 그물을 내려서 끌며 싹쓸이하는 조업 방식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청소부 역할을 하며 바다 바닥을 뒤집어 주니 해초가 잘 자라고 물고기도 모여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고대구리 어선이 바다 밭을 갈아주는 경운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태풍이 와서 바다를 한번 뒤집어 줘야 바다 생태계가 건강해진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고대구리가 없어지면서 바다 바닥이 온통 불가사리나 쓰레기들로 덮여 바닥이 썩어가니 해초가 자랄 수 없고 물고기도 살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외지에서 온 큰 통발배들은 통발을 몇천 개씩 뿌리고 주낚배들도 어장을 싹쓸이해가는 것은 단속하지 않으니 섬 지역 어민들의 불만이 크다. 정부 정책대로라면 고대구리 어업 금지로 어장이 좋아졌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고 더 악화됐다.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부는 어민들의 호소를 귀담아들어야 할 것이다.

서불의 신화가 남겨진 글썽이

초등학교 뒤편에는 글썽이까지 길이 나 있다. 글썽이 마을이 있던 지역이 지금은 무인 지경이 됐지만 언덕에서 바라보는 다도해 풍경은 압도적이다. 글썽이란 이름은 글씨가 써진 바위가 있는 까닭에서 유래했다. 예전에는 언덕 아래 서불과차란 글이 써진 바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대체 진시황의 불로초를 찾으러 동남동녀 300명씩을 태우고 막대한 자금을 챙기고 진나라를 떠났던 서불은 이 나라 섬들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

그것이 전설일지라도 전설이 생긴 것은 서불의 이야기가 섬들 곳곳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니 결코 그냥 전설일 리가 없다. 그와 함께 흘러왔던 동남동녀의 후예들이 지금 이 나라 해안지방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밀진포도 한때는 융성했었다. 30여 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달랑 한 가구만 남았다. 부부 둘이 사는데 두릅 재배로 짭짤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이장이 귀띔해 준다. 한때는 일본 무역선들이 들어와서 갯장어를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가던 기항지였다. 당시에는 가게, 술집들도 많았다. 색시가 나오는 방석집도 여럿 있었다. 큰 마을에도 선술집이 5개나 있었지만 색시집은 밀진포에만 있었으니 사내들은 밀진포로 몰려들었다. 밀진포에는 ‘이께스’라 부르는 수조가 많았다. 잡아온 갯장어를 보관해 두던 수조. 이께스는 오동나무를 이용해 배 모양으로 제작했다. 갯장어 꼬리가 상하지 않게 보관할 수 있게 한 어구다.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다.

비자금 마을에는 5가구가 살고 있다. 비자금은 대두라도와 인접해 있는데 이 해협의 수심이 깊고 자갈이 많은데도 적조가 자주 발생한다. 잔(작은)비자금은 가장 안전한 피항지다. 섬들로 둘러싸여 있는 까닭에 태풍에도 안전하다. 그래서 가두리가 제법 많다. 5가구가 살다가 지금은 모두 떠나고 양식장만 남았다. 인근 소나무 숲은 온통 왜가리 차지다. 왜가리 때문에 섬 주민들은 골칫거리다. 철새였던 녀석들이 텃새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가두리 양식장의 치어를 잡아먹고 산다. 왜가리를 퇴치하려는 주민들과 환경단체 사이에 가끔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간의 먹거리를 노리는 왜가리와 인간의 공존, 간단치 않은 일이지만 포기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니 늘 딜레마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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