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식 < 혜원의료재단 세종병원 이사장 pjsheart@sejongh.co.kr >

‘의식을 잃게 한다. 가슴 피부를 칼로 자른다. 가슴뼈를 자른다. 심장 박동을 멈추게 한다. 심장을 칼로 자른다.’

엽기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심장수술실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의 심장을 칼로 자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대고, 위장을 잘라내는 것을 허락하는 일이 매일 일어난다. 그것도 생면부지의 사람 손에 맡기면서 말이다. 물론 여기서 그 생면부지의 사람은 의사다.

의사와 환자는 불시에 찾아온 병마와 함께 싸워가는 동반자다. 환자는 어떤 고비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의사의 손길만을 믿고 걸어가야 한다. 밑이 보이지 않는 깊디깊은 죽음의 계곡을 의사의 손 하나를 믿고 건너간다. 온전한 신뢰 관계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생명을 맡길 수 있는 그 신뢰는 사회가 의사에게 허락해 준 ‘의사’ 타이틀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그래서 의사들이 가운을 입을 때는 언제나 그 무게를 무겁게 느끼고 긴장한다.
뉴스에는 제대로 소독되지 않은 주사기를 사용한 나쁜 병원, 환자의 수술을 무자격자에게 대신 맡긴 나쁜 의사 이야기가 연일 나온다. 드라마에는 대기업에서 파견된 사장의 압력에 굴복해 환자에게 건강식품을 파는 의사들이 묘사된다. 이런 뉴스, 이런 드라마를 본 환자들이 의료진을 믿을 수 있을까.

불신은 고민을 낳고, 고민은 나쁜 결정을 낳는 경우가 많다.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의사가 추천한 치료 방법을 믿지 못하고, 다른 병원에서 한 번 더 검사하고 다시 의견을 묻는다. 주변의 ‘카더라’ 통신도 빠짐없이 챙긴다. 그나마 검사 한 번 더 하고 의사 한 번 더 만나는 것까지는 다행이다. 카더라 통신에 빠져 민간요법에 의존하다 치료 시기를 놓치는 안타까운 경우까지 생긴다.

불신은 의료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극소수의 ‘나쁜 사람’들이 만들어 낸 불신의 뉴스가 넘쳐나고, 드라마와 영화는 불신과 배신 없이 살 수 없는 비열한 세상을 그린다. 마치 신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신뢰의 가치에 걸맞은 책임감으로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인간이 국가라는 대규모 집단을 이뤄 살 수 있는 건 제도를 바탕으로 구축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들이 만들어가는 신뢰의 가치는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다. 이런 자산을 축적해가는 일상의 작은 노력이 더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돼 잃어가는 신뢰의 가치가 회복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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