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위협은 남은 상태에서
한미동맹 와해되는 게 큰 문제

주한미군 철수도 수용할 수 있는
'트럼프 변수' 앞에서
운전자 역할 서두르지 말고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해야"

이영조 <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

최근 미국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공포(Fear)》라는 책이 화제다. ‘백악관의 트럼프’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곱지 않은 속살을 파헤쳐 오는 11월 중간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 서한을 고위 참모들이 어떻게 빼돌렸는지를 다룬 프롤로그로 시작하는 이 책에는 한국과 한·미 관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트럼프는 한·미 관계를 언급하면서 툭하면 욕설을 내뱉는다. “35억달러에 2만8000명이라. 나는 그들이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다”는 트럼프에게 밤에 편히 자려면 필요하다고 하자, “씨× 것. 필요 없다. 없어도 나는 아기처럼 잠만 잘 잘 거다”고 했다. 성주에 배치된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를 두고 한국에서 논란이 일자, “엿 먹어라. 빼내서 포틀랜드에 갖다 놔”라고 했다고 한다.

이 같은 트럼프의 속내를 그가 후보 시절부터 공개적으로 표방한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과 겹쳐 보면 한·미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려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연설에서 “누가 우리의 달러를 받고 보호받는지, 누가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지 검증하겠다”며 “미국은 우리를 존경하고 우리의 친구라고 할 만한 이들에게만 원조하겠다”고 했다. 한국은 한·미 FTA로 미국의 달러도 벌고, 미국의 핵우산으로 보호도 받는 국가다. 트럼프 연설을 한국에 대입하면 한국은 미국의 경제적 도움과 군사적 보호에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검증받아야 한다. 트럼프의 의심대로 그렇지 않은 나라로 판단되는 순간 졸지에 보호할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앞서가고 있다. 남북한이 서명한 군사합의서에 대해 주한유엔군사령관 지명자는 “(GP 철수 등) 비무장지대 내 모든 활동은 유엔군 사령부 소관”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남북 군사합의에 미국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 바 있다. 지난달 26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북한이 평화와 번영의 의지를 밝힌 만큼 “이제 국제 사회가 북한의 새로운 선택과 노력에 화답할 차례”라고 하며 유엔 제재 완화를 촉구해 미국을 앞질렀다. 따지고 보면 종전선언이나 제재 완화에 앞서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를 요구해야 할 것은 미국보다는 한국이다. 종전이 선언되면, 설사 북한이 중도에 비핵화에서 발뺌하더라도 다시 전쟁 개시를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다르다. 자멸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한 북한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따라서 위협을 약간 줄이는 상태에서 미봉하더라도 미국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은 없다. 말로만 하는 종전선언의 대가로 11월의 중간선거와 2년 뒤 대통령 선거에 보탬이 될 정도의 결과만 얻어내도 그만이다.

주한미군 철수도 트럼프식 계산에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북한이 제대로 비핵화하지 않아 한국이 미국 보호를 다시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만큼 한국에 사용할 지렛대가 커지기 때문이다. 이때는 주둔 비용은 물론 전략자산 전개 비용까지도 전액 요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게 트럼프다. 사드 논란의 와중에 한·미 FTA 폐지를 들고나온 트럼프에게 허버트 맥매스터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이 때가 좋지 않다고 하자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이 문제를 꺼낼 때다. 만약 그들이 보호를 원한다면 지금이 재협상을 시작할 때다. 지렛대는 우리에게 있다.” 트럼프의 ‘협상의 기술’ 제3조는 지렛대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한국이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사이에 끼어 안보 위협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한·미 동맹이 와해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남북 관계 개선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게 나아가야 한다. 운전자 역할을 자임하고 마냥 서두를 일이 아니다.

yjlee@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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