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까지 청작화랑서 작품전
판화에 한국적 이미지 접목

오는 22일까지 청작화랑에 전시되는 박래현 화백의 작품 ‘바다의 현상’.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그대여!/ 내 못다 운 울음을 우느냐/ 겨울뜨락은/ 그대 제일로 아픈 공허에 찬 심장에/ 내 부르는 소리만 메아리쳐 되돌아 오는/ 그런 서러움으로 나날을 채우며/ 되씹어야 하는가….’

한국 화단의 거목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이 1976년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 우향 박래현 화백(1920~1976)에 대한 애달픈 마음과 그리움을 눈물로 쓴 글이다. 가난과 청각장애로 고통받으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우던 운보에게 우향은 삶의 동반자이자 예술적 동료였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전북 군산에서 자란 우향은 근·현대를 두루 거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미술가였다. 전통 채색화부터 서구 모더니즘 회화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넘나들며 동양화와 서양화의 이분법에 제한받지 않고 독창적인 미학세계를 일궈냈다. 1956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노점(露店)’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거머쥐었다. 1969년 뉴욕으로 건너간 그는 프렛 그래픽센터와 밥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판화를 공부하며 동양화의 다양한 실험을 전개해 나갔다.
삶과 예술을 일치시키며 한 편의 드라마처럼 살다간 우향의 작품전이 오랜만에 마련됐다. 1988년 ‘운보-우향 부부’전 이후 30년 만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청작화랑에서 지난 10일 시작해 오는 22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1970년대 뉴욕시절 창작의 혼을 아낌없이 불사른 판화, 드로잉 30여 점을 내보인다. ‘태고’ ‘흔적’ ‘고담C’ 등 15점은 처음 일반에 공개되는 작품이다. 동판을 긁고 파서 만든 동판화 에칭 작업들이다.

서양기법의 판화에 한국적 이미지를 접목한 출품작들은 한국 여성 거장의 미학적 감성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뉴욕 맨해튼의 용솟음치는 바다를 붉은색과 청색, 노란색, 검은색으로 잡아낸 작품 ‘바다의 현상’은 엥포르멜(Informel·비정형) 화풍의 대표작이다. 꿈틀거리는 물결과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잡아낸 작품에서는 시공을 초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추상적이고 선명한 색면과 함께 기다란 띠들이 등장한 ‘고담’도 나와 있다. 맷방석의 엮음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줄줄이 꿴 엽전같기도 하다. 머나먼 이국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화면에 반딧불이처럼 형상화한 ‘빛의 향연’시리즈,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경지를 화폭에 쏟아낸 ‘생명’, 구상과 추상을 합쳐 모노크롬 화풍으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묘사한 ‘회상’ 등도 눈길을 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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