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정부가 다 통제하려는 국가주의 안돼"

"기업가는 경제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사회적 가치 키운다"

전 재산 다 준다고해도 내 지식과 바꿀 생각 없어
강대국 공통점은 국민 70% 이상이 독서하는 것
'감사합니다' 인사 많이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

“요즘 정부의 경제정책을 보면 국내 이슈만 해결하면 모든 경제문제가 풀릴 거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경제에는 따로 국경이 없는데 말이죠.”

우리 나이로 올해 백수(白壽·99세)를 맞은 원로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사진)는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14일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신산업경영원 주최로 열린 조찬강연회에서다. 김 교수는 고(故) 안병욱 숭실대 철학과 교수, 고 김태길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 ‘국내 3대 철학자 겸 수필가’로 꼽히는 국가 원로급 학자다.

김 교수는 “우리나라 경제문제를 풀려면 시야를 국제무대로 넓혀야 한다”며 “칠판에 찍힌 점이 아니라 칠판 전체를 봐야 하는데, 원로들조차 정부에 이런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지금 정부는 국가 권력이 경제나 사회정책을 통제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에 빠져 있다”며 “경제문제는 궁극적으로 기업가가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정부 정책이 원칙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며 “(현 정책 결정자들이 원칙만을 고수하는 모습은) 마치 기독교인이 성경 말씀을 원칙대로 따르느라 기독교 정신의 본질을 놓치는 것과 같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로 독서를 꼽았다. 그는 “나이가 들면 문장력이나 기억력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만 독서를 통해 생각의 수준은 끌어올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독서가 가장 필요한 나이는 학교와 직장을 떠나 가정으로 돌아가는 60대”라며 “이때 독서를 통해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으면 90대까지 시대에 뒤처지지 않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육체적 건강을 위해선 50대 중반부터 시작한 수영을 4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1주일에 2~3회 수영장을 찾고, 하루 50분씩 규칙적으로 걷는다.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사진)의 삶에는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던 윤동주 시인과 평양 숭실중학교 동기다. 윤 시인보다 세 살 어리지만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신사 참배 거부로 학교가 문을 닫으면서 두 사람의 운명도 갈렸다. 만주 용정으로 떠난 윤동주와 달리 김 교수는 평양시립도서관으로 매일 ‘출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철학과 문학이었다. ‘한국의 3대 철학자 겸 수필가’로 꼽히는 김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도 오랜 사색과 경험에서 나온 삶의 지혜를 쏟아냈다.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날 ‘일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 김 교수가 들려준 일화 한 토막.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길을 걷고 있었어요. 마침 고급 차를 타고 지나가던 친구가 저를 발견했습니다. 차에 올라타면서 제가 그랬죠. ‘내가 공부는 더 잘했는데 돈은 네가 다 벌었구나.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고요. 그러자 친구가 ‘그럼 네 지식과 내 자가용을 바꾸자’고 하더군요. ‘전 재산을 줘도 안 바꾼다’고 했습니다.”

김 교수는 “내게는 오랜 기간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돈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각자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만큼 ‘경제적 평준화가 이뤄지면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된다’는 건 그야말로 좁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일의 가치를 깨닫는 사회’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며 “일하면서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자신의 손자가 넬슨 록펠러 부통령의 손자와 한 반에서 공부한 일화도 들려줬다.
“손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록펠러 가문의 아이가 잔디깎기, 접시닦기 등 아르바이트를 너무 열심히 하더랍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내 용돈은 너희와 비슷하지만 10%를 교회에 헌금으로 내야 해. 부족한 돈을 채워야지’라는 답이 돌아왔답니다.”

그는 “록펠러 가문은 기업 경영을 통해 번 돈으로 미국의 교육 사회 문화 종교 발전에 기여했다”며 “학자는 학문으로, 기업인은 경제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사회적 가치를 키우는 데 보탬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00세 시대’… 무엇을 남길 것인가

김 교수는 지난 99년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었던 시절을 60대로 꼽았다. 그는 “통상 60대가 되면 인생의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는 대다수 인간은 60대가 돼야 철이 든다”고 말했다.

“50대까지의 삶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기 마련이에요. 내 가치관에 따라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시점은 60세부터라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통해 사회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하면 최소한 75세까지는 스스로 성장하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90세에도 ‘내가 많이 컸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강대국의 공통된 특징을 독서에서 찾았다. 세계 문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5개국은 ‘전 국민의 70% 이상이 책을 읽는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독서는 이들 5개국이 경제·사회적으로 다른 나라를 압도하게 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이 중국을 앞선 배경에도 독서가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김 교수는 “젊은이들에게 인간을 키워주는 학문인 인문학책을 읽으라고 조언한다”며 “그래야 한국에서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고, 아시아의 문화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老)철학자가 생각하는 인생의 행복은 어떤 걸까.

“돈 많은 사람, 출세한 사람, 유명한 사람이 제일 행복할까요. 저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란 인사를 많이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를 위해 봉사해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의 미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봉사, 그것만큼 중요한 게 있겠습니까.”

■ 김형석 명예교수는…

△1920년 평안남도 대동 출생
△1943년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 졸업 △1947년 월남
△1947년 서울 중앙중 교사
△1950년 서울 중앙고 교감
△1954~1985년 연세대 철학과 교수
△1979년 연세대 인문과학연구소장
△1985년~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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