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식 < 혜원의료재단 세종병원 이사장 pjsheart@sejongh.co.kr >

“덥다 덥다 해도 이렇게 덥긴 처음이야!” 올여름 내내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무섭게 기승을 부리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성난 햇살에 누렇게 타들어가 영영 시들어버릴 것 같던 초목들이, 몇 차례의 바람과 단비 후 기적처럼 다시 살아나 싱싱한 초록을 뽐낸다. 가을 내음을 싣고 출근길 차창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뭔가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는 것 같다.

진료실 창밖으로 보이는 맑게 갠 하늘과 초록이 넘치는 까치공원을 보면서 기분 좋게 외래 진료를 시작했다. 진료실 컴퓨터에 표시돼 있는 진료예약 환자 명단에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작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가까스로 회복한 뒤 퇴원했는데, 몇 개월 후에 집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 관절이 골절돼 중환자실에서 한 달여간 사경을 헤매던 분이다. 칠순을 훌쩍 넘긴 고령에 당뇨, 신부전, 심근경색 등 중한 병은 다 앓고 계신 분이라 두 번째 쓰러져 오셨을 때는 회복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관절 치환술이라는 큰 수술을 이겨내고, 두 달이 넘는 입원 기간을 기적처럼 버텨 넘기고 퇴원하셨다.
잘해 드린 것도 없는데 할머니는 올 때마다 나를 보는 것이 반갑고 즐거우시단다. 혼자 걷기 힘겨워 딸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오시지만,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오늘은 들어오면서 오른손을 쭉 뻗더니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하신다. 너무 세게 하면 다칠까 걱정되는 가녀린 손이었지만, 힘껏 하이파이브를 해 드리고 한참을 서로 웃었다.

병원은 매일매일, 순간순간이 기적으로 가득찬 공간이다. 병마가 할퀴고 간 상처와 의사들이 병을 고친다고 헤집어놓은 살들이 어느 틈엔가 아물어간다. 수술 후 수많은 주사와 생명보조장치를 달고 회복실로 온 환자의 몸에서 주사기가 하나씩 떨어져 나간다. 생명보조장치들의 강도가 조금씩 줄어든다. 매일 보는 모습이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제나 경이롭다. 우리는 기적을 믿는다. 그리고 의료진의 관심과 정성이 기적을 더 자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믿고 환자를 치료한다. ‘We care, God cures. (우리는 돌볼 뿐이고, 치료는 신께서 하신다)’ 18세기 어느 외과의사가 남긴 말이다. 오늘의 하이파이브를 떠올리며, 내일도 더 많은 축복으로 더 많은 환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길 기대하며 진료실을 나선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