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에 발목잡힌 대기업들

정부 지배구조 개편 압박에 기업들 '本業' 뒷전

글로벌 사업 이끌어야 할 핵심인재들 투입
지분 '교통정리' 하느라 수조원 발 묶여
미래투자·연구개발·M&A 등 신경 못 써

“맨날 ‘그림’ 그리다 날 샐 판입니다.”

국내 4대 그룹의 주요 계열사를 이끄는 한 최고경영자(CEO)의 토로다. “딱 부러지는 답이 없는데 정부가 자꾸 정답을 내놓으라고 하니 답답하다”고도 했다. ‘큰 그림(그룹 지배구조)’을 바꾸라는 정부의 집요한 압박에 대한 하소연이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등 간판 그룹들은 정부가 내준 ‘숙제’를 풀기 위해 상당수 핵심 인력을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몰아넣고 있다. SK 등 다른 기업들도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주회사 및 일감몰아주기 규제 강화 탓에 계열사 지분 ‘교통정리’에 골몰하고 있다.

대기업들이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매몰돼 중장기 투자전략 수립이나 인수합병(M&A) 등 ‘본업(本業)’엔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지배구조 걱정에 빠진 삼성·현대차

정부로부터 그룹 전반의 지배구조 개편 압박을 받는 대표적 대기업은 삼성과 현대차 두 곳이다. 삼성은 연내 지배구조 개편 방안 발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심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92%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며 삼성생명이 쥐고 있는 삼성전자 지분을 팔라고 압박하고 있다.

삼성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은 삼성생명이 들고 있는 지분 중 2% 정도를 삼성전자의 2대 주주(지분율 4.65%)인 삼성물산이 사들이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되면 삼성전자의 최대주주는 ‘금융자본’인 삼성생명(매각 후 5.92%)에서 ‘산업자본’인 삼성물산(매입 후 6.65%)으로 바뀐다. 문제는 국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정부의 압박까지 이어질 경우 삼성생명이 나머지 삼성전자 지분도 팔아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점이다. 최대 16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지분을 사줄 수 있는 계열사는 없다. 삼성의 고민이 깊어진 이유다.

현대차그룹도 최근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지난 5월 엘리엇매니지먼트와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 ISS 등의 반대에 발목이 잡혀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잠정 중단한 지 석 달 만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을 대상으로 추가 자문사 선정 작업을 하고 있다. 기존 자문단을 확대, 보강하기 위한 조치다. 시장에선 현실적 대안으로 현대모비스의 분할부문을 먼저 상장한 뒤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기존 방안을 아예 뒤집어 현대차 등 주요 계열사를 분할·합병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재계에선 한국을 대표하는 두 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에 매몰돼 정작 글로벌 사업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나온다. 연구개발(R&D), M&A 등 미래 먹거리 발굴에 써야 할 자금 수조원이 지배구조 이슈 때문에 묶여 잠자고 있어서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삼성과 현대차가 큰 숙제를 앞둔 상황에서 ‘빅딜’을 검토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글로벌 경쟁을 주도해야 할 에이스급 인재들이 엉뚱한 곳에 힘을 빼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삼성은 지난해 미래전략실을 해체한 뒤 만든 삼성전자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에 핵심 인력을 투입해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도 중·장기 전략을 총괄하는 그룹 기획조정실 인력 수십 명이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매달려 있다.

◆대기업마다 지분 ‘교통정리’ 비상

삼성과 현대차뿐만 아니다. 이미 큰 틀의 지배구조 윤곽을 잡아놓은 SK그룹의 ‘셈법’도 다시 복잡해졌다. 그동안 SK텔레콤을 중심으로 한 중간지주사 전환을 검토해왔지만 쉽지 않게 됐다. 공정위가 지주회사의 자회사와 손자회사 보유 지분율 요건을 상장사 30%, 비상장사 50%로 종전보다 10%포인트 높였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SK하이닉스의 지분 20.07%를 보유하고 있다. SK텔레콤이 중간지주사로 전환하면 SK하이닉스의 지분을 30%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분 매입에 써야 할 돈만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SK해운, SK E&S, SK바이오텍, SK실트론 등이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오르는 것도 부담이다. 지주사의 손자회사가 자회사를 거느릴 때 지분 100%를 보유하도록 한 규정 탓에 앞으로 대형 M&A를 추진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공정거래법 관련 규제를 강화하면서 SK를 비롯해 LG 롯데 현대중공업 등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그룹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하소연도 제기된다. 지주회사는 오너 일가 지분율이 높아 비상장 자회사 대부분이 일감몰아주기 대상에 편입되기 때문이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정부가 한쪽으로는 지주회사의 자회사 지분율을 높이라고 압박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지분율 50%를 초과하면 일감몰아주기 규제를 적용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재계에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업 지배구조 개편 압박이 이어지면서 헤지펀드에 공격의 ‘빌미’만 제공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 압박에 떠밀려 국내 대기업들이 지배구조 개편 카드를 만질 때마다 길목을 지키던 해외 헤지펀드들이 어김없이 달려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장창민/오상헌/도병욱/김보형/박상익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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