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H씨의 남편 P씨가 5억여원을 빌려주고 돈을 떼였다. 빚을 진 사람이 파산신청을 하면서다. 남편이 돈을 못 받게 되자 주부 H씨는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기 위해 계획적으로 파산신청을 했다며 페이스북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비난성 글까지 남겼다. H씨는 명예훼손죄로 처벌될 수 있을까.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5부(부장판사 한정훈)는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주부 H씨(39)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1심)을 일부 파기하고 벌금 50만원형을 선고했다. 돈을 떼인 피해자로서는 채무자의 파산신청을 계획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허위사실 유포는 성립하지 않을지라도, 사실을 유포해 명예훼손을 한 건 맞다는 취지에서다.

◆5억원 떼먹히고 억울함 토로한 피의자

H씨는 2016년 8월부터 같은해 11월까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페이스북에 W 스포츠용품 판매사의 대표 P씨를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P씨가 H씨의 남편이 운영하는 O 스포츠용품 제조업체에게 물품 대금으로 5억7767만원을 지급해야 했는데 계획적인 파산신청으로 이를 떼먹었다는 내용이었다.

H씨는 페이스북에 “남편에게 5억이 넘는 물품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계획적인 파산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5억원이 넘는 돈을 안 갚고 사기 파산 해놓고 잘 먹고 잘 산다”, “물품 대금을 5억원씩이나 안 갚고 파산으로 배째라고 나올 거였으면 돈을 좀 꿍쳐두지 그랬어”라며 P씨를 비난했다.

사건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H씨의 남편이 운영하는 스포츠용품 제조업체 O사는 P씨가 대표로 있는 W사에 2011년 10월 19일부터 2012년 12월 31일까지 5억7767만원어치의 물품을 납품했다. 하지만 W사는 2013년 3월 22일 법원으로부터 법인 파산 선고를 받았다. O사가 갖고 있던 5억이 넘는 물품대금 채권은 휴지조각이 됐다. 이어 P씨 본인도 2013년 4월 29일 개인 파산 선고를 받아 물품 채권의 연대 책임까지 모두 면제 받았다.

P씨를 오랜 시간 믿고 거래해온 H씨의 남편 입장에서는 한 순간에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이로 인해 O사의 경영 상황은 크게 악화됐다. W사가 물품 대급 지급을 계속 미루면서 자금융통 등 채무 변제를 하기 위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갑작스런 파산신청을 한 사실은 법원도 인정했다.
심지어 P씨는 파산면책 직후 동종의 스키용품 판매렌탈 업체인 A사의 정보책임자 직책으로 근무했는데 이 업체의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와 부사업장 주소지는 종전의 P씨가 운영하던 회사와 동일했다. H씨로서는 P씨가 5억원 이상의 물품을 다른 회사로 빼돌리고 파산신청을 한 것 아닌가 의심할 만한 대목이었다. 실제 P씨는 또 다른 업체를 자신의 배우자 명의로 등록하고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법원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은 인정”

검찰은 P씨가 고의적으로 남편에 대한 채무를 회피하고자 파산을 신청한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H씨의 이 같은 글 내용이 허위라고 보고 H씨를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로 기소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거액의 채무를 파산면책 받아 책임을 면하게 됐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라며 “피해자(P씨)의 도덕성과 무책임한 태도를 비난하며 다소 경멸적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하거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내심의 의사에 관한 모욕적 언사 내지 의견표명을 덧붙인 것으로 허위사실이라 인정하기 어렵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H씨가 구체적인 허위사실을 적었거나 허위사실임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적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검찰은 이에 항소했다. 허위사실이 아닌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죄(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 수위가 낮아진다. 2심 재판부는 “허위사실은 아니더라도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한 것은 인정된다”며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서는 사실상 최소 벌금형에 그치는 수준이다.

H씨를 대리한 김진우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는 “H씨와 그의 남편은 사업을 하던 상대방의 급작스런 파산신청으로 큰 손해를 입었고 극도의 배신감과 거리로 내몰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런 답답한 심정을 인터넷에 토로한 것”이라며 “재판 과정에서 오히려 계획적 파산의 정황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허위사실이라 보기 어렵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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