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 서울관, '단색화 거장' 윤형근 화백 회고전

미공개작·드로잉 등 180여점
12월16일까지 전시 이어져

부역 논란·복역·죽음 문턱
그 속의 울분·독기 풀어내

"덧없음에 대한 시각적 명상"
2007년 작고 이후 격찬 쏟아져

1970년대 단색화 선도에도
정상화보다 작품 가격 저평가

큰 붓으로 작업하던 윤형근 화백의 생전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내 작품은 그림이 아니다. 그냥 화풀이 작업으로 이해해달라. 뭘 그려야겠다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기분 좋은 그 무엇을 추구한다. 그러나 언제나 어렵다.”

한국 대표 미술 장르인 단색화의 거목 윤형근 화백(1928~2007)이 생전 자주 하던 말이다. 그는 1947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해 제적당한 뒤 홍익대에 편입했다. 6·25전쟁이 끝나자 전쟁통에 북한 미술동맹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1973년에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로 부정 입학한 학생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감옥살이를 했다. 모두 세 번의 복역과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윤 화백은 만 45세에 이른 1973년께부터 그동안의 분노와 울분, 독기를 작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 화백의 훈수도 작업에 큰 힘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윤형근 화백의 1975년작 ‘엄버 블루’.

국립현대미술관은 윤 화백의 파란만장한 삶과 불굴의 도전정신을 조명한다. 지난 4일 소격동 서울관에서 개막한 ‘윤형근’전은 불혹의 나이에 죽어라 그림에 몰두했던 작가의 치열한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오는 12월16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2007년 작고 이후 유족이 보관해온 미공개작 40여 점을 비롯해 드로잉 4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이 걸렸다. 1983년 서울 서교동에 직접 설계한 집을 짓고 2007년 작고할 때까지 거주한 생활공간과 작업실도 전시장으로 옮겨놨다.

출품작들은 서툰 듯하면서도 수수하고 듬직한 멋을 지녔다. 하늘을 뜻하는 블루(blue·청색)와 땅의 색깔인 엄버(umber·암갈색)를 섞어 탄생시킨 오묘한 검정을 큰 붓으로 찍어 내려 시대의 아픔을 아울렀다. 오일을 타서 면포나 마포에 내려 그으면 ‘문(門)’과 같은 형태의 작품이 나온다는 의미에서 이를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불렀다. ‘독기를 품은 천지’를 질기게 물고 늘어져서인지 색면은 언뜻 보면 그저 하나로 뭉그러진 검은 덩어리로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 아래서부터 서서히 다른 색들이 올라온다. 검은색의 우뚝 선 구조들 사이로 무언가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 미국 미술평론가 조지프 러브는 “덧없음에 대한 시각적 명상을 이끌어내는 장(場)”이라고 격찬했다.
두 개의 검은 사각형을 세워놓은 말년의 작품들도 현실 세계를 펼쳐놓은 듯 고독과 죽음, 비애, 슬픔에 관한 지극히 담담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칠하고 말리고 다시 칠하기를 반복한 끝에 아득한 깊이감을 만들어낸 검정 기둥들 앞에서는 숙연한 마음이 든다.

◆2억~6억원대… 박서보의 절반 가격

윤 화백의 삶을 풀어낸 작품들은 최근 단색화 및 추상화 열풍과 맞물리면서 수요층이 늘고 가격도 오르고 있다. 2015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3년간 경매 출품작 215점 중 182점이 팔려 누적 낙찰총액은 87억원에 이른다. 한국 단색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 작품들은 해외 컬렉터들로부터도 주목받고 있다. 작년 1월에는 뉴욕 메이저 화랑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의 개인전에서 출품작이 ‘완판’되기도 했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2014년 11월 이후 4년간 총 12점 중 11점(낙찰률 91%, 낙찰총액 24억원)이 새 주인을 찾았고 1975년작 ‘엄버 블루’는 2016년 경매에서 460만홍콩달러(약 6억6000만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돼 자신의 최고가를 세웠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생존 작가 정상화와 박서보 화백에 비하면 가격이 여전히 저평가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서보와 정상화 작품이 경매시장에서 점당 10억원대 안팎까지 치솟은 반면 윤 화백의 그림값은 점당 2억~6억원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 작고 작가라는 프리미엄과 한국의 대표적 단색화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작품 가격의 추가 상승 여력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영석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이사장은 “윤 화백이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추상화 대표 작가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작품 수는 워낙 적어 10억원대 진입을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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