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 운영 공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이 사명(社名) 변경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가 탈(脫)원전을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상황에서 사명에 ‘원자력’을 굳이 넣을 이유가 없다”는 게 한수원 측 설명이다. 하지만 원자력을 뺀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내에서 원전 24기를 독점 운영하며 전문성을 쌓은 곳은 한수원이 유일하다. 그런 한수원의 사명 변경은 곧 ‘원자력 축소, 신재생 확대’로 가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원전 전문성이 희석될 것이란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한수원은 사명에 신경 쓸 만큼 한가로운 처지도 아니다. 지난 3월 말 기준 부채가 29조8153억원으로 1년 전보다 2조8000억원 이상 불어났다. 신재생 발전원(源)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감안하면 향후 재정이 더 악화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탈원전과 관계없이 원전 수출을 하겠다는 방침에 비춰봐도 그렇다. 회사 인지도가 수출에 얼마나 중요한지는 긴 설명이 필요없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동유럽과 아시아 원전 수출을 한수원에 맡겼다. 21조원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수주전은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판국에 사명에서 원자력을 빼면 해외에선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결국 한수원의 자기 부정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신규 원전 건설 중단 등 청와대와 정부가 보여주는 일련의 탈원전 행보에서 비롯됐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최근 국내 원자력 전문가 5000여 명이 참여한 한국원자력학회가 탈원전 정책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정부의 성급한 탈원전으로 일자리·공급망·수출 등 원자력 산업 생태계 붕괴, 전기 공급 불안 및 비용 증가, 그리고 이로 인한 국가 주력산업의 경쟁력 상실이 눈앞에 닥쳐왔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이 이러는 동안 중국에서는 ‘원전 굴기’론이 한창이다. 원전을 속속 재가동하기 시작한 일본은 경제산업성과 대기업, 원자로 제조사 등 민관 공동으로 차세대 원자로 개발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미국도 첨단 원자력 연구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한국의 ‘탈원전’ 역주행이 걱정스럽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