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녀 <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중앙대 교수 sung-nyo@hanmail.net >

어느 날 한 쌍의 부부를 만났다. 주세페 김과 구미코 김이었다. 팝페라를 하는 부부성악가인데 100년 전 순국한 ‘인간 페치카’ 최재형 선생을 기리는 뮤지컬을 준비한다고 했다. 조심스럽게 내레이션으로 동참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하는데 처음 보는 분들이지만 뭔가 간절한 마음이 전해져 거절하지 못했다.

‘페치카’란 러시아풍의 난로를 일컫는 말이다. 항일독립운동가이며 기업가, 교육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구현하며 고려인들의 따듯한 인간난로였던 최재형 선생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는 추앙받는 독립운동가지만 우리에게는 잊힌, 아니 기억조차 없는 최재형 선생을 현재로 불러내는 작업현장은 눈물겨웠다.

이들 부부는 제작비가 부족해 제작, 홍보, 예술감독, 음악감독, 작곡, 지휘, 주연까지 일인다역을 해내며 동분서주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연습 사이사이 단원들의 식사까지 직접 만들어 해결했다. 부부가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들은 함께 참여하는 연극인을 동지로 만들었고 처음 도전하는 연기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연기로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가장 감동스러운 부분은 주세페 김이 작곡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들이었다. 아무런 장식 없이 순백의 영혼처럼 느껴지는 이 부부의 노래들은 시를 낭송하듯이 절절하고 고귀했다.

이렇게 뛰어난 성악가들이 왜 아무도 관심 없는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리고자 이리 고생일까. 무엇이 이 예술가들의 영혼을 움직여 이 어려운 길을 가게 할까. 이념갈등, 황금만능주의, 일등주의로 분열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따듯한 난로 ‘페치카’로 불린 휴머니스트, 무수저 영웅 최재형을 조명함으로 그 답을 찾고 싶었을까?

아무도 하지 않는 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등에 지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이 부부의 열정은 어디서 오는지 생각하는 사이 막이 오른다. 객석을 가득 채운 청소년과 후원자들을 향해 뼈아픈 과거사를 생생하게 체험할 항해를 시작했다. 환호와 함께 막이 내리고 주세페 김이 인사말을 한다.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내년에 또다시 찾아뵙겠다고. 말로 표현 못 할 고생을 지켜본 나에게는 ‘또다시’란 말이 뜻밖의 반전이었다.

왜 어려운 고생을 사서 하냐고 물어보기 전에 가슴이 먼저 따듯해진다.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돈키호테처럼 이해타산 따지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에 삶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삭막하지 않다. 얼떨결에 뮤지컬 ‘페치카’에 동참해서 한발을 슬며시 담근 나의 참여가 페치카 정신에 대한 가치를 음미하는 순간 자랑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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