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보잘것없던 그가 저수지 감시인으로 채용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의 완장을 찬 그 앞에서 사람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서 푼어치 권력’에 취한 그는 밤에 고기를 잡던 초등학교 동창과 그 아들을 두들겨 패고, 낚시하러 온 도시 남녀에게 기합을 주며 거들먹거렸다. 면 소재지가 있는 읍내에 나갈 때도 완장을 차고 활보했다.

급기야 자신을 고용한 사장 일행의 낚시까지 금지하다 감시인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에도 ‘완장의 환상’에 사로잡혀 가뭄 해소용으로 물을 빼려는 수리조합이나 경찰과 부딪쳤다.

속물근성 풍자한 우리 사회 거울

윤흥길 소설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은 인간 내면의 권력 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작가는 그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폐해와 그 한계를 신랄하게 풍자했다. 완장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팔에 두르는 표장’이다. 그러나 임종술은 이를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권리와 힘’으로 받아들였다. 일제시대 헌병과 6·25 때 죽창부대의 완장이 꼭 그랬다. 독일 나치 친위대와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도 그랬다.

쥐꼬리만 한 권력이라도 쥐고 나면 모든 부분에 휘두르려고 하는 게 속물의 근성이다. 가진 것 없고 잃을 것도 없는 술집 작부 부월에게는 이런 완장이 부질없는 것에 불과했다.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 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 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주워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임종술이 완장을 저수지에 버리고 부월과 밤봇짐을 싼 다음날, 물이 빠지는 저수지에 떠다니는 완장은 권력의 허상을 보여주는 상징 매개다.
또 한 사람. 박완서 소설 《아저씨의 훈장》에 나오는 너우네 아저씨도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6·25전쟁 중 장손을 중시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아들 대신 장조카를 데리고 월남했다. 한 사람밖에 동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친아들이 아니라 죽은 형의 아들인 장조카를 택한 ‘결단’을 그는 평생의 자랑거리로 삼았다. 함께 월남한 고향 사람들도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권력이 공감을 얻을 때 권위 생겨

그러다 세상이 바뀌었다. 사회의 가치가 달라지자 그에 대한 평판도 뒤집혔다. 이번에는 비난의 대상이 됐다.

장조카에게도 버림받은 그는 삶의 끝자락에서 친아들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괴로워한다. 자물쇠 행상으로 장조카를 키우면서 ‘자물쇠를 훈장처럼 빛나게 닦던’ 그에게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은 한때 빛났다가 녹스는 ‘훈장’과 같다. 사회적 평판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보이지 않는 훈장’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그는 또 다른 ‘완장’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완장’과 ‘훈장’의 그늘은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권력의 본질을 잘못 알고 엉뚱하게 사용하면 한순간에 추락한다. 크든 작든 유혹에 시달리고, 자신의 좋은 특성마저 잃게 된다. 심리학자 대커 켈트너가 말하는 ‘권력의 역설’에 포획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권력(power)은 권위(authority)와 성격이 다르다. ‘복종’을 앞세운 권력은 타율적이고 외면적인 지배에 무게를 둔다. ‘공감’을 동반한 권위는 자발적이고 내면적인 존중에 의미를 둔다. 6·13 선거 후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서 권력과 권위, 완장과 훈장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본다. 완장이든 훈장이든 그 속에는 독성이 들어 있다. 옷에 달 때 필요한 뾰족핀 같은, 장미 가시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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