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산을 넘어야 할 北核 폐기
동맹 조율하며 최악상황 대비해야

김태우 < 前 통일연구원장 >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미·북 정상회담은 미국의 전문가들도 “참으로 역사적이고 전례 없는” 사건으로 평가했다. 70년 간 불구대천의 원수로 지내온 두 나라 정상이 밝은 미래를 향한 합의문을 도출했으니 그렇게 평가할 만도 하다. 이 역사적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합의한 것은 ‘새로운 미·북 관계 수립 추진’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노력’ ‘4·27 판문점 선언 재확인 및 한반도 비핵화 노력’ ‘전쟁포로 유해발굴 및 송환’ 등 네 가지다. 그러나 한국 입장에서는 내용이 부실하고 실망스러우며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 정권이 선의(善意)를 가지고 있다면, 다시 말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개혁·개방과 남북상생을 통해 주민의 삶을 개선하면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기를 작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번 정상회담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그리고 세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동북아의 신냉전을 완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냉전종식을 선언했던 1989년 몰타선언에 비유될 수 있으며, 한국 국민을 짓눌러 온 핵 악몽을 걷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남북상생 구도의 구축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악의(惡意)를 품고 있다면, 즉 북한이 펼치고 있는 평화공세와 대화국면이 지금까지 구축한 핵 지렛대를 이용, 한반도에서 미국을 떨쳐내고 ‘주체통일’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대남전략의 일환이라면, 이번 미·북 정상회담은 한국에 또 다른 시련을 예고하는 사건일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 여정은 합의 단계, 이행 단계, 최종 검증 단계 등 적어도 세 개의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이번 합의문은 북한 비핵화의 강도, 속도, 방법 등 핵심사안에 대한 ‘원칙’을 합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지극히 ‘원칙적인 방향’에만 합의했을 뿐이다. 즉, 북한 비핵화 여정은 이제 겨우 첫 번째 산을 오르기 시작했을 뿐이며,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 절차, 속도 등은 이제부터 이어질 미·북 핵협상에서 도출해내야 한다. 북한은 이 과정에서 원론합의 후 각론에서 반대하기, 의제 쪼개기, 지연 전술 등을 얼마든지 구사하면서 핵대화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북핵 폐기’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란 표현이 사용된 것과, 북한이 ‘체제보장’ 명분으로 요구할 수 있는 반대급부의 범위가 광범위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연합훈련 중단, 전략자산 전개 등을 시비할 수도 있고, 한·미 동맹 자체를 ‘체제에 대한 위협’이라고 우기고 나올 수도 있으며, 조기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요구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 정부의 책무는 막중하다. 북한의 변화를 선도하기 위한 대화 노력은 지속해야 하지만, 북한의 의도를 간파하는 노력이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또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체제보장 조치들이 한국의 안보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들일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북한에 주어지는 반대급부는 어디까지나 북한의 선의와 실천을 확인해나가는 것에 비례해야 한다. 국민에게 성급한 평화의 환상을 심어주는 언행은 자제해야 하며, 미·북 간의 대화를 성원하되 미국이 한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들을 앞질러 취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한다. 지금은 고난도 동맹조율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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