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달러 호황에 취한 사람들
경제현실 제대로 보고 있나
국민들 다시 고생시켜선 안돼"

조일훈 편집국 부국장

나라가 못살면 국민이 고생을 한다. 만고의 진리다. 1960년대 독일로 건너간 한국 간호사들이 그랬고 요즘 부쩍 국내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필리핀 가사 도우미들이 그렇다.

필리핀은 1970년대 초까지 일본과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경제강국이었다. 광물과 농업자원이 풍부하기도 했지만,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제조업을 집중 육성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 한국의 많은 여성이 가정부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구직 행렬의 방향이 반대로 바뀐 것은 잘나가던 필리핀 경제가 무너지면서다. 정치의 타락이 결정적이었다. 포퓰리즘에 따른 막대한 재정적자, 권력의 이권 독점과 정부의 부패로 붕괴된 산업기반은 재건되지 않았다.

현재 필리핀을 먹여살리는 사람들은 기업인도, 공무원도 아니다. 전 세계에 파견(?)돼 있는 600만 명의 가사 도우미들이다. 지난해 이들이 본국으로 보낸 송금액은 160억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필리핀 총 수출액(628억달러)의 25%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대견하지만, 한편으론 처연하다.

비인간적 구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글로벌 노동시장의 분업 시스템은 언제나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다. 좋은 일자리는 잘사는 나라의, 나쁜 일자리는 못사는 나라의 국민에게 돌아간다. 선진국 대도시의 식당 주방과 호텔 청소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라가 못살면 국민이 고생을 한다.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대한민국은 점차 잊어가는 것 같다. 서울 강남의 수입차 전시장은 대호황이다. 대기업과 금융회사를 다니는 맞벌이 부부들은 고가의 외제차를 덥석덥석 집어든다. 주말을 이용해 한 달에 한 번꼴로 일본과 홍콩 등지를 다녀오는 사람도 많다. 지나치게 상습적이다.

다 자기가 잘나서 잘사는 줄 안다. 이들에게 한국은 더 이상 신흥국이 아니다. 필리핀 가정부가 한국에서 월 150만원을 벌어 본국으로 50만~60만원을 보내면 그 돈으로 한 가족이 먹고산다는 현실에는 관심이 없다. 한국이 장차 중국의 하청기지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고민도 남의 일이다.
노동계는 더 이기적이다. 정확하게 말해, 정치적 권력을 틀어쥔 노동귀족들이다. 탄력적 고용을 가능케 하는 그 어떤 제도에도 반대한다. 오로지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 중소기업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고통도 안중에 없다.

그리고 청와대와 정부다. ‘나라가 못살면 국민이 고생한다’는 말을 되풀이해서 들려주고 싶은 상대다.

한 나라의 성장률이나 생산 총량은 ‘근로자×근로시간×생산성’에 비례한다. 여기서 시간이 줄어들면 근로자 수가 늘거나 생산성이 올라야 한다. 많은 나라가 근로시간의 지속적 감소에도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지금은 장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생산성 하락이 심상치 않다. 2010년부터 2017년까지 근로자 1인당 연평균 노동생산성은 마이너스 0.35%에 머물렀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으로 신규 고용 여력도 눈에 띄게 약화됐다. 여기에 주요 기업들이 선택한 근로시간 단축은 파격을 넘어 자기파괴적이다. 주 52시간에 턱걸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주 40시간 이하로 간다. 법정 근로시간을 어기면 대표이사를 감옥에 보낸다는 법률 때문이다.

일하는 방식을 효율화하면 된다고 한다. 어리둥절할 뿐이다. 올 하반기 근로시간을 싹둑 잘라놓고도 성과를 유지하는 대기업 경영자가 있다면 연말에 바로 사표를 받아야 한다. 그 경영자는 지금까지 방만경영을 해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금리, 환율, 소득, 복지가 영원할 것으로 믿는 사람이 많다. 아예 하늘에서 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철부지들도 있다. 국민소득 3만달러 파티장에 슬슬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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