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19> 고흥 애도·사양도

외나로도에 사양도까지 육지와 연결
홀로 섬으로 남은 애도의 산 정상엔
300여종 꽃 어우러진 ‘천상의 화원’

전국 섬 중에서 소득이 가장 많았던 사양도는 지금은 고적하면서도 정겹다.

외나로도 축정항은 들고나는 어선들로 늘 분주하다. 여수와 거문도 사이를 오가는 여객선들도 축정항을 기항지로 들고난다. 나로도는 내외 나로도 두 개의 섬을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외나로도에는 나로우주센터가 있는데 우주센터는 한국이 자체 기술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건설한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발사기지다. 작은 어선이 드나드는 어촌 마을 부근에 최첨단 우주선 기지가 있다는 것은 왠지 어색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잘 어울리는 풍경이기도 하다. 바닷속이나 우주나 인간에게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가 아닌가!

우주기지에서 하늘 정원의 섬으로

축정항 앞바다에 있는 애도와 사양도는 섬 속의 섬이다. 애도와 사양도가 파도와 바람을 막아주는 덕에 나로도 만 안의 축정항은 최고의 어항이 될 수 있었다. 애도로 가는 배는 이 축정항에서 출항한다. 외나로도는 연륙이 된 내나로도와 다리가 놓이면서 진즉에 뭍으로 편입됐다. 사양도 역시 최근 내나로도 와교마을과 다리가 놓여 육지로 편입됐다. 이제 이 부근의 온전한 섬은 애도뿐이다. 애도는 축정항에서 불과 500m. 하지만 섬으로 남은 덕에 애도는 더 귀한 섬이 됐다.

매력적인 자연이 숨어 있는 애도의 돌담길.

애도는 면적 0.32㎢에 주민 25명 남짓이 살아가는 아주 작은 섬이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70가구에 300명이나 살았지만 어업이 쇠퇴하면서 애도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젊은 사람들은 내륙으로 떠나고 이제는 노인들만 남았다. 어업이 성황을 이루던 시절 애도는 인근에서 가장 부유한 섬이었다. 애도 사람은 대다수가 안강망(아귀 입처럼 생긴 그물) 어업을 했었는데 인근 어장에서 안강망 그물에 조기·갈치·민어·병어·삼치·새우 등이 사철 잡혀 돈을 가마니에 담고 다닐 정도였다. 그래서 돈 섬이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안강망 어업을 하는 중선배가 40척이나 있었다. 중선배는 선원이 7~8명 정도 타는 큰 어선이다. 그 배로 애도 사람들은 연평도까지 가서 조기를 잡아오기도 했다. 바다에서 번 돈으로 육지에 논을 사서 소작을 줄 정도였다. 그래서 육지 사람들도 제법 부자가 아니면 애도로 딸을 시집보낼 생각을 못할 정도로 대단한 위세를 떨치던 섬이다.

섬은 본래 봉호도(蓬湖島)라 부르다 주민들의 건의로 2010년 7월에 애도로 명칭이 바뀌었다. 봉호도나 애도나 쑥과 관련된 지명이다. 애도에는 쑥이 많이 나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바구니를 몇 개씩 들고 줄지어 쑥을 캐러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쑥섬이었고 지금도 쑥섬이다. 애도는 섬 전체가 바다에 솟은 하나의 산이라 할 만한데 마을은 산 아래 작은 평지에 들어서 있다. 산비탈과 산 정상까지 개간해 밭을 만들고 그 밭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지금도 섬은 작지만 500여 종의 나무와 30여 종이나 되는 야생화가 자라고 있다.

애도 당산 숲에는 동백나무, 육박나무, 후박나무 등 상록수 아름드리 고목들로 울창한 원시림이 있다. 이 숲은 400년의 숨결을 간직한 난대 원시림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제17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누리상을 받았다, 예전에는 당숲에서 당할머니를 주신으로 모시고 당제를 지냈다. 지금도 당집에는 봉호신주와 당할머님 신주 두 위패가 모셔져 있지만 더 이상 당제는 지내지 않고 있다.

반전 매력이 가득한 섬 애도

애도는 반전의 매력이 있는 섬이다. 정면에서 볼 때는 별 볼 것 없이 평범해 보이지만 당산을 지나 섬의 산정에 가까워지면 놀라운 절경이 숨어 있다. 거기 다도해의 섬과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 정상의 널찍한 밭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이 심어져 있는데 이 꽃밭은 전라남도 1호 민간 정원이다. 그야말로 공중정원, 하늘 정원이라 할 만하다. 정원에서는 연중 300여 종류의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한다. 꽃피는 철엔 그야말로 천상의 화원이다.

버려져 있던 묵정밭에 꽃을 피우게 한 것은 한 사람의 집념이다. 주인공은 고흥 백양중학교 국어교사인 김상현 선생이다. 김 선생의 어머니는 정신연령이 8~12세인 지적장애인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공장 일을 하며 김 선생 4남매를 키워내셨다. 김 선생의 외조부모님 고향이 애도였다. 외조부모는 외손자에게 자신의 딸을 잘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김 선생은 대학과 군 생활을 제외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고흥 땅을 떠나지 않고 지켰고 마침내 애도로 들어와 섬 주민들과 함께 정원을 가꿨다. 쇠락해 가는 외조부모님 고향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기 위해서였다.

사양도 주민의 모습.

애도와 하늘정원에는 입장료를 받는 이가 따로 없지만 ‘양심 돈 통’이 놓여 있다. 입장료 5000원을 양심껏 넣으면 된다. 그 덕에 김 선생은 지난해 마을발전기금으로 500만원을 기부할 수 있었다. 김 선생이 지은 갈매기 모양의 카페는 마을 부녀회에 운영권을 줬다. 정원의 꽃들만큼이나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전국 어가 소득 1위였던 사양도

애도와 형제섬인 사양도는 한때 전국 어촌 중에서 최고로 부유한 섬마을이었다. 1978년 전국 어가소득 1위로 대통령상을 받았을 정도다. 그래서 사양도는 경제동향보고 지정마을이기도 했었다. 인근의 나로도나 애도처럼 어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섬이다. 최근 섬의 시대를 끝내고 내륙으로 편입된 사양도. 내륙의 시대가 사양도에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리가 놓였지만 나로도를 드나드는 주민의 편의를 위해 아직도 여객선은 애도를 거쳐 사양도까지 오간다. 나그네는 선창마을에서 내렸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마을 아래로 해안도로가 큰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선창마을 해안에는 조개껍데기가 패총처럼 쌓여 있다. 대부분이 굴껍데기다. 쓸모없이 버려지는 저 굴껍데기들이 예전에는 건물 벽에 바르는 횟가루 재료였다.

섬을 중심으로 바닷물이 사방으로 흐른다 해서 사양도(泗洋島)란 이름을 얻었다지만 이름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다. 비변사인방안지도(備邊司印方眼地圖), 해동지도(海東地圖) 등에는 현재의 ‘泗洋島’가 아니라 ‘四梁島(사량도)’로 표기돼 있다. 과거에는 뇌섬(雷島) 혹은 노섬(櫓島)이라 했는데, 우레가 떨어져 뇌도라 했고, 노섬이란 근처의 ‘각시여’에서 노가 밀려 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유래 또한 불분명하다. 차라리 남해의 노도처럼 사양도의 산에 노를 만들 수 있는 나무가 많아 노섬이라 했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민중사가 그렇듯이 섬이나 섬 살이에 대한 기록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으니 이름의 유래 하나 찾기도 쉽지가 않다. 더구나 한글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전혀 엉뚱한 이름을 갖게 된 경우도 허다하니 글자의 뜻만으로 이름의 유래를 찾는 것은 부정확하기 일쑤다.

쇠락했지만 정겹고 넉넉한 섬

사양도는 애도보다는 큰 편이지만 면적 0.915㎢, 해안선 둘레 4㎞의 아담한 섬이다. 110가구 180여 명의 주민이 선창마을과 큰 마을(사양마을) 두 곳에 모여 산다. 고려 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공도정책으로 비어 있던 많은 섬에 다시 사람들의 입도가 허락된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다.

사양도의 소박한 매력 때문에 점차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양도 또한 조선 선조 때 영암에 거주한 김덕상이 입도했고 이후 장성에서 고씨와 고흥 동강에서 신씨가 가솔들을 이끌고 입도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섬 중앙의 봉화산은 해발 207m로 작은 섬에 있는 산치곤 제법 높다. ‘봉화산’에는 용 발자국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산 중턱에는 또 삼복더위에도 시원한 굴이 있는데 옛날에 스님이 살았었다 해서 ‘중굴’이라 부른다.

사양도의 민가

선창마을과 사양마을 두 마을 사이에 폐교와 보건소가 있다. 규모는 큰 마을이 더 크지만 과거 두 마을의 세력은 막상막하였을 것이다. 보통 학교나 관공서는 기세가 더 센 마을로 가기 마련이다. 그 두 마을의 세력이 비등할 때는 가운데쯤에 위치한다. 작은 마을인 선창마을이 옛날 안강망어업을 할 때는 위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그 증거물이 저 학교다. 실제로 선창마을이 바로 전국 어가소득 1위를 차지했던 마을이다. 1978년에 가구당 1153만원의 소득을 올렸다니 대단한 고소득이 아닌가. 1978년 11월10일 선창마을이 대통령상을 수상할 때 새마을지도자 김종우(金宗雨, 당시 37세) 씨와 부녀지도자 곽형임(郭亨任) 씨는 훈장을 받았다. 학교 건물은 1970년에 준공됐는데 위아래로 두 동이다. 외관은 멀쩡한데 내부는 폐허가 됐고 학교와 관사의 지붕은 칡넝쿨이 점령했다. 풀만 무성한 운동장, 아이들이 떠나간 섬은 적막하다.

사양도

많이 쇠락했으나 지금도 사양도에는 20여 척의 새우잡이 배가 마을의 경제를 지탱한다. 또 몇 척은 삼치잡이를 하면서 은성했던 섬의 역사를 이어간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는 큰 마을에 ‘박공집’이 많았었다고 한다. 박공이란 기와집 지붕을 이르는 섬의 언어이니 부잣집이 많았다는 말씀이다. 한옥 기와지붕은 우진각, 팔짝, 맞배지붕 등이 있는데 박공집은 맞배지붕 집이다. 해안도로가에도 제법 규모가 있는 박공집이 한 채 있다. 대문간의 사랑채는 규모가 작은 2층 한옥이다. 지붕의 기와는 들어내서 이제 더 이상 기와집이 아니지만 골격은 그대로 한옥. 아름드리 기둥이며 대들보, 서까래 등은 여전히 튼실해 보인다. “집주인의 할배가 아주 큰 부자였다”고 할머니는 알려주신다.

할머니는 내나로도 신금리서 스무 살 때 시집 와 평생을 사양도에서 살았다. 어찌 큰 섬에서 더 작은 섬으로 시집을 오셨을까. 처음에는 얼마나 갑갑했을까.

“모르고 왔제. 부모가 가랑게 간거제. 지금같이 빤듯하면 어찌 온당가.”

부모가 혼처를 정해주니 작은 섬인 줄도 모르고 시집을 오셨다. 그때는 다들 그런 시절을 살았다.

“젊어서는 싸워도 못 건너 갔어.”

부부 싸움을 해도 피할 데가 없던 섬. 섬에 한 번 들어오면 부대끼고 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남편이 자상하고 부지런했다. 둘이서 어선을 했다.

“아자씨랑 고깃배 해서 돈 많이 벌었소.”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기르고 대처로 내보내 독립시켰다. 그렇게 많이 번 돈도 자식들 다 나눠줬다.

“쌓아 놓으면 뭣한다우.”

고생해서 번 돈이지만 자식들 살림 밑천으로 아낌없이 갈라줬으니 흡족하다.

“무지 무지 야문 새끼들이었어.”

자식들이 자리 잡고 든든하게 살아주니 고맙다. 섬은 어미의 품처럼 넉넉하다.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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