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보다 노래, 스토리보다 감성에 중점
근사하게 재연된 영화의 명장면도 좋아

원종원 <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jwon@sch.ac.kr >

붉은 노을이 지는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남녀가 키스를 나눈다. 앙코르 막을 올린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엔딩신이다. 객석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온다.

영화로 익숙한 제목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소설이 원작이다.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철부지 양갓집 규수에서 강인한 여인으로 성장하는 스칼렛 오하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로 치면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비할 만한데 마거릿 미첼이 1936년 발표한 이 대하소설을 1939년 빅터 플레밍 감독이 영화로 탈바꿈시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성공을 거뒀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 속 이야기를 과연 영화에 모두 담아낼 수 있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기도 했는데, 주연을 맡은 비비언 리와 클라크 게이블이 그야말로 신들린 연기를 선보이며 이 작품의 흥행에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국내에서도 편집이 없는 원작 그대로의 222분 상연이 화제가 됐는데,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화장실을 다녀와야 한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오간 적이 있다.
의외로 들릴지 모르지만, 뮤지컬로 탈바꿈시킨 것은 프랑스 예술가들이다. ‘프랑켄슈타인’이나 ‘셜록 홈스’도 창작 뮤지컬로 만들어지고, 영국 작가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 베로나를 배경으로 쓴 ‘로미오와 줄리엣’이 프랑스 뮤지컬로 각색되는 요즘이기에 국적을 넘나드는 파격과 실험쯤은 상관없다고 여긴다면 무대의 글로벌한 흐름을 이해하는 수준급 애호가라 인정할 만하다. 여기에 프랑스의 특별한 ‘영화 사랑’을 전제한다면 이 무대를 가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뮤지컬 ‘십계’가 찰턴 헤스턴의 영화 속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거나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앤서니 퀸과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떠올리게 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은 뮤지컬 무대만의 ‘별미’를 탄생시켰다. 촘촘하기보다 듬성듬성한 극 전개가 그렇다. 장편소설과 보통 영화의 곱절에 가까운 영상을 무대화하면서 프랑스 예술가들이 취한 방식은 ‘선택과 집중’이다. 이 덕분에 뮤지컬은 영화나 소설을 알고 봐야 재미를 더 만끽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게 됐다. 대사보다 노래를, 스토리보다 감성을, 그리고 친절한 설명보다 함축적인 압축미를 즐기는 프랑스 뮤지컬의 매력이 적극 활용됐다. 이 때문에 원작을 멀게 느끼는 일부 한국 관객에게는 허술한 극 전개가 모호한 잔상을 남기는 문제점을 낳았다. 장면 사이의 비약을 원작에 대한 이해로 보충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 작품을 즐기는 재미가 완성될 수 있다는 점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 무대 감상의 전제다.

한국 관객을 위해 프랑스 원작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타라의 테마’를 극의 앞뒤에 배치한 것은 절묘한 시도다. ‘주말의 명화’ 시그널로 유명했던 이 선율은 원작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프랑스 뮤지컬에서의 16 대 9 화면 같은 무대를 한국 라이선스 공연에서 4 대 9의 안방극장 브라운관으로 축소시킨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회화 같은 몇몇 장면은 무척 고급스럽다. 코르셋을 조여 개미허리를 만드는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스칼렛과 레트의 키스신은 정말 근사하게 재연된다. ‘미스 사이공’의 헤로인 김보경이나 우리말 공연 초연 배우인 바다, 버틀러를 연기하는 김준현, 최근 주인공을 뽑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봤던 배우들과의 만남도 즐겁다. 초여름에 잘 어울리는 근사한 공연장 나들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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