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모 생활경제부장

지난 주말 한반도 정세는 한 편의 반전 드라마였다. 주인공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날짜와 장소가 확정된 미·북 정상회담을 일방 취소 통보한 뒤 하루 만에 “예정대로 진행할 수도 있다”고 변덕을 부렸다. 기겁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SOS를 쳤고, 문 대통령은 한걸음에 판문점으로 달려갔다. 두 사람의 격한 포옹 장면은 감격과 기대보다 불안과 우려를 더 많이 자아냈다. 이를 지켜본 트럼프는 “6·12 회담을 검토 중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보자”고 했다. 예정대로 진행되면 다행이지만 그 반대라면 어떻게 될까. 몇몇 시나리오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의 역습

그런데 더 큰 걱정은 경제 문제다. 곳곳에서 빨간불이 켜지고 있다. 지난 4월 무역흑자는 1년 전에 비해 반 토막 났다. 물건이 안 팔려 재고가 쌓이면서 제조업가동률은 70.3%로, 9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내수 기업의 한 고위 임원은 “이달부터 매출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걱정했다. 일자리 지표를 보면 민생은 더 빠르게 말라붙고 있다는 느낌이다. 통상 30만 명을 웃돌던 취업자 증가 수는 3개월째 10만 명대에 머물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라고 한다. 청년실업률(10.7%)은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일자리 정부’의 성적표인지 의아할 뿐이다.

정부는 지난해 국정운영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을 인용했다. 롤스가 기회 균등과 함께 분배적 정의를 강조한 점에 주목한 것이다. 롤스는 책 제1장에서 “소득의 불평등을 허용하되 가난한 자의 처지가 향상된다면 부자들이 더 큰 이익을 취한다고 해도 부(不)정의한 것은 아니다”고 갈파했다. 《정의론》이 진보뿐 아니라 보수진영에서도 환영받은 이유다.
롤스의 잣대로 보면 불행히도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나라로 향하고 있다. 올 1분기에 가계 소득 최상위 20%의 소득은 전년 동기보다 9.3% 증가했지만 하위 20%는 8% 줄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쇼크로 저소득층이 실직하거나 근로시간이 줄어든 게 주된 원인이다. 롤스가 살아 있다면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소득 분배는 최악으로 나빠진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선의(善意)로 포장된 무지의 정책이 낳은 참사라고나 할까.

국정 에너지 민생경제로 돌려야

정부가 북핵 외교에 전력투구하는 동안 민생은 이렇게 오그라들고 있다. 김정은에게 쏟아붓던 국정 에너지를 이제는 경제로 돌려야 할 때다. 문 대통령은 최근 혁신성장 보고대회에서 “성장과 고용의 한계에 직면한 우리 경제가 도약하려면 혁신성장을 해야 한다. 정부는 자신감을 갖고 추진해 달라”고 주문했다. 냉정한 진단이었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다. 혁신성장과 고용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부의 잇단 대기업 압박 공세는 대기업을 경제 도약과 일자리 창출, 공정 분배를 가로막는 악(惡)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들게 한다. 대기업의 사업 범위 제한에 이어 협력 업체와의 이익공유제, 납품단가 조사, 오너의 지배력 약화 등을 법제화하려는 시도들이다. 이 모두가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과 수익 창출 의욕을 꺾는 반(反)기업적·반시장적 정책들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분배 정의를 위한 선의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유무역·개방경제 시대에 보호만으로 강소기업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격언이 새삼 떠오르는 요즘이다.

jang@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