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분쟁 불씨 된 한국식 '상생 규제'

'AH서한', 한·미 통상 마찰 방아쇠 되나

유진·AH 공구마트 1호점
"영세 소상인 생존권 위협"
시흥유통조합, 사업조정 신청
중기부 '개점 3년 연기' 권고

AH "이런 경우는 처음…최장 6년간 영업 말라니
다른 글로벌 유통사들과 규제 형평성도 맞지 않아"

유진그룹의 주택보수 DIY 전문매장 개설에 반대하는 한국산업용재협회 회원 등 상공인들이 14일 서울 여의도공원 문화마당에서 시위하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대·중소기업 상생을 위한 각종 제도는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확대돼왔다. 약자를 보호하고 양극화를 해소한다는 명분은 진보와 보수진영 양쪽에서 환영받았다. 국제통상 규범에 위배된다는 우려도 제기됐지만 외국기업의 이익을 크게 침해한 사례는 여태껏 없던 터라 ‘통상 마찰’ 문제는 터지지 않았다.

정부도 직접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고 기업 간 자율조정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키는 데 주력했다. 정부 개입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나면 그로 인한 파장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건자재업체 에이스하드웨어(AH)가 한국시장 진출에 실패할 위기에 처하자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부당함’을 호소한 것에 주목하는 이유다.

에이스하드웨어인터내셔널이 제이 휴그너 대표 명의로 주한 미국대사관에 보낸 서한의 첫 페이지.

◆산업부에 항의 나선 미 대사관

AH는 유진그룹과 물품공급 및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올 3월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1호점을 완공했다. 매장 명칭은 유진과 협의해 ‘에이스 홈센터’로 정했다. 이미 2호점 부지도 확보해놨다. 하지만 시흥유통조합이 중소벤처기업부에 사업조정을 신청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심의위원회 결과 중기부는 AH-유진 측에 3년 개장 연기를 권고·명령했다. 3년 연장이 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AH와 유진은 최대 6년간 영업을 못 하게 된 것이다. 권고를 위반하면 2년 이하 징역에 처하거나 1억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된다. 제이 휴그너 AH인터내셔널 대표는 “AH 진출로 주변 상권과 소상공인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가정 아래 정부가 진출을 막고 있다”며 “60여 개국에 진출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고 서한에 적었다. 그는 “금천점은 물론 매장을 추가할 때마다 정부가 또다시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려스럽다”며 “한국에 진출하려는 다른 미국 기업도 마찬가지 일을 겪을 것”이라고 했다.

◆쏟아지는 골목상권 민원

전문가들은 이번 ‘AH 서한’이 한·미 간 통상마찰의 ‘방아쇠’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내놨다. ‘한국식 상생 규범’이 국제통상 규범 저촉 논란으로 번질 수 있어서다.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의 실효성 논란이 한창이던 작년 7월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보고서를 통해 ‘제도 자체보다는 미국 기업의 실질적 피해 여부로 평가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대사관이 산업통상자원부에 항의 서한을 전달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통상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AH 워싱턴 본사는 세계무역기구(WTO)에 관련 사안을 제소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사 이익을 침해당했다고 해석한다는 얘기다. 유진그룹도 이달 초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심판소송을 제기했다.

그간 정부는 통상마찰의 불씨를 만들지 않기 위해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해왔다. 스웨덴에 본사를 둔 글로벌 가구유통업체 이케아가 지난해 진출했을 때만 해도 영업은 허용하되 판매 물품 조정, 영업장 면적 축소, 휴일제 적용 등의 조치로 골목상권 침해를 최소화하는 데 주력했다. AH가 대사관에 보낸 서한에서 “다른 거대 유통업체들은 훨씬 덜한 규제를 받았다”며 “한국의 법률자문회사들에 문의해 보니 3년간 영업 연기 조치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다”고 언급한 배경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중소기업이나 영세상인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잦아졌다. 공정거래조정원에 따르면 지난해 소상공인이 골목상권과 관련해 신청한 조정은 총 964건에 달했다. 이는 전년(540건) 대비 79% 증가한 규모다. 국회도 여야를 막론하고 ‘약자’ 편에 서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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