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부문 정규직화 '후폭풍'

노동계 반발에 직무급제 도입 사실상 무산

'동일노동 동일임금' 외치던 勞, 호봉제 고수
정부는 노동계 눈치… '임금 개편' 꼬리 내려
재정부담 눈덩이… "정책 뿌리째 흔들린다"

한국노동연구원의 ‘공공부문 표준임금 모델안’은 호봉제 중심의 낡은 임금체계를 직무급 중심으로 바꾸는 내용이다. 직무급제 도입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다. 노동계 요구인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들어주면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따른 국민 부담을 그나마 줄여줄 수 있는 방편으로 꼽혔다.

하지만 정작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절반가량(전환율 49.3%) 이뤄지자 노동계는 말을 바꿨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보다는 정규직 소수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호봉제를 요구한 것이다. 예컨대 용역·파견업체 직원들의 평균 급여는 연 2000만원 수준인데, 이번에 정규직 전환을 한 지방자치단체 청소원들의 연봉은 호봉제 적용에 따라 4000만원으로 뛰었다. 표준임금 모델을 도입한다던 정부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노동계 눈치를 보느라 임금체계 개편을 외면하면 공공부문의 재정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남 청소원 월급, 서울의 2배

호봉제의 불합리한 단면은 지방자치단체별 무기계약직(사실상 정규직 대우) 임금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노동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기준 서울 지역 시설관리직(경비) 근로자의 최초 호봉은 월 179만원, 마지막 호봉은 419만원이다. 마지막 호봉이 최초 호봉의 2.33배에 이른다. 노동연구원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근로자들은 대체로 저숙련 직종이어서 2~7년 정도면 업무에 숙달된다”며 “그 이상의 근속연수에 호봉제를 적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지역별 격차도 크다. 경기 지역은 마지막 호봉이 282만원인 반면 전남 지역은 488만원에 달한다. 청소 직종도 마찬가지다. 서울 지역(최초 179만원~마지막 호봉 208만원), 전남 지역(212만~433만원) 등 지역에 따라 차이가 크고 연차가 쌓이면 더 벌어진다. 기존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이와 똑같은 호봉제를 적용받게 된다. 배규식 노동연구원장은 “같은 정부 청사건물인데 A동에서 일하는 청소원과 B동 청소원의 월급 차이가 100만원 이상 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공공부문 표준임금 모델은 호봉제를 직무급제로 바꾸면서 임금 상승 구간을 기존 최대 30단계에서 6단계로 축소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정부는 우선 5개 주요 직종(청소, 경비, 시설관리, 사무, 조리)의 임금 체계와 직무등급을 표준화하고 다른 직종으로 점차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

노동계 압박에 직무급제 무력화

하지만 노동계는 공공기관과 정규직 전환 협의를 할 때 직무급 대신 호봉제를 적용하도록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다. 지금까지 1단계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대상자(20만5000명) 중 절반가량인 10만여 명에 대해 정규직 전환이 결정됐다. 이 중 직무급을 도입한 공공기관은 행정안전부 산하 정부청사관리본부와 코레일 등에 불과하다.

대다수 공공기관은 기존대로 호봉제를 쓴다. 특히 지자체 정규직 전환 대상자 1만6000여 명(지난달 말 기준)은 전부 호봉제를 적용했다. 노동연구원은 “지자체의 무기계약직(공무직) 직원들은 지자체장들이 지방선거를 앞둔 점을 활용해 교섭력을 높이면서 직무급제를 무력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렵게 직무급을 도입한 공공기관들도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민주일반연맹은 “행안부의 직무급제 도입은 신분제적 비정규직 차별을 고착화한다”며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임금체계를 개편하지 않으면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 공무원 확대 등 정부의 공공부문 정책이 뿌리째 흔들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자 20만 명에게 연 1000만원어치의 임금과 복지혜택이 추가되면 연 2조원의 비용 부담이 생긴다. 더구나 호봉제는 시간이 갈수록 재정 부담이 몇 배로 커지는 구조다.

이상희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는 “이를 초기에 바로잡지 않으면 과거 60세 정년 연장 논의 때와 마찬가지로 임금체계 개편은 손도 못 대고 사용자 부담만 커지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심은지 기자 summ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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