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편집국 부국장

노무현 정부 때 관료그룹과 386(3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정권 실세들 간 갈등은 심각했다. 386실세들이 노무현 정부의 분배 위주 정책을 밀어붙이려 할 때 관료그룹은 성장과 시장이란 다른 코드로 맞섰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재임기간 내내 386실세들과 충돌했다. 여당의 소장파 의원들이 아파트 원가 공개를 추진하자 그는 “386세대가 경제하는 법을 모른다”고 각을 세웠다. 직후 386그룹이 이 부총리의 야인시절 은행 자문료를 갖고 도덕성 시비를 걸자 “그런 식으로 뒷다리를 잡아가지고 시장경제가 되겠느냐”고 반발했다.

대통령의 마음을 잡으려는 경쟁도 치열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한 한 경제관료는 “우리가 낮에 시장원리와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열심히 설명해 노 대통령 생각을 ‘오른쪽’으로 돌려놓으면, 386측근들이 밤에 대통령과 술을 마시며 다시 ‘왼쪽’으로 되돌려 놓곤 했다”고 회상했다.

문재인정부 실세들 관료 불신 깊어

그때의 386들이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세인 586그룹이다. 관료들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아직도 뿌리 깊다. “노무현 정부가 개혁과제를 완성하지 못한 건 관료들이 제동을 건 탓”이라고 말하는 586실세들도 있다. 이들은 관료그룹을 기득권 세력과 공생해온 적폐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노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대통령도 시각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 인사 파문 때 문 대통령은 ‘논란을 피하는 무난한 선택을 하려면 관료 출신을 임명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선 외부 발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관료로는 개혁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러나 있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실장, 정책실장, 경제수석 등 권부의 핵심은 물론 주요 경제장관 자리를 시민단체 운동가와 교수, 정치인들로 채운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1년간 ‘관료 패싱’이 두드러진 건 당연한 귀결이다. 일부 정치인 출신 장관들이 정책 결정 때 관료들 보고는 무시하고 측근 정책보좌관들 얘기만 듣는다는 것은 세종시 관가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다 보니 이상에만 치우쳐 비현실적이고, 부작용만 낳는 정책이 이어지고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삼성 반도체 공장 기밀 공개 등 노동 정책이 대표적이다.

관료 배제한 개혁, 성공 힘들어

개혁을 위해선 정권 초 개혁그룹의 주도가 불가피하고, 역대 정부에서도 그래왔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역대 정부는 예외 없이 정권 초 개혁그룹의 시행착오를 거쳐 정권 중반 이후 관료를 중용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개혁그룹만으론 개혁에 성공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정책에 대한 전문성과 현장 경험이 많은 엘리트 집단이다. 개혁의 이상을 현실에 접목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평가받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도 관료그룹의 설득과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당시 관료들과 386 간 견제와 균형은 여러 정책의 안정성을 높이기도 했다.

관료를 개혁 대상으로 볼지, 개혁의 일꾼으로 활용할지는 정권의 선택이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막스 베버의 말은 이 대목에서도 새겨볼 만하다. ‘정치는 천사적 대의를 위해 악마와도 타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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