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편집국 부국장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국회의원 시절 피감기관들의 수장을 몰아붙이는 수법은 잔혹했다. “부끄럽지 않으세요?” “자존심도 없습니까?”라는 고압적 야유와 추궁은 상대방의 인격을 무참하게 짓이겼다. 연구소 금융회사 금융기관의 ‘선량한 관리자’들이 다수였다. 정책적 비판은 몰라도 이 정도로 모욕을 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제19대 국회 정무위원회 야당간사, 김기식은 너무나 두려운 존재였다.

김 전 원장은 이제 그 세월의 부메랑을 맞고 있다. 그에 대한 평판은 ‘위법 여부’ ‘도덕성의 평균’에 관계없이 이미 바닥으로 추락했다. 과거 날선 질책을 받았던 사람들에겐 드라마틱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법적 권한을 넘어선 갑질

하지만 최근 상황을 ‘김기식의 자업자득’으로만 정리할 수는 없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무소불위로 일컬어지는 국회의 권능과 맞닿아 있다. 한국 국회의원들은 정말 힘이 세다. 상임위원회 소위에서 한 사람이 작심하고 어깃장을 놓으면 해당 법안의 국회 통과는 하세월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은 헌법과 국회법이 보장하는 권한을 넘어서 사실상 모든 일에 개입할 수 있다. 법적 권능과 ‘갑질’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이다. 누구도 그들의 자료 공개나 면담 요청을 거부하기가 어렵다. 대정부 질문이나 국정감사, 각종 청문회에 불려 나가거나 검찰에 고발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의 예산에도 멋대로 개입한다. 이유야 다 있다. 하지만 공적 명분과 사적 이해관계가 뒤섞여있기 일쑤다. 예산 심의 막바지가 되면 1조원에 가까운 돈이 원래 자리를 이탈해 허공을 날아다닌다. 실세들이 쪽지예산을 만드는 동안 한쪽 구석에선 가위질을 당하는 사업들이 속출한다.
이런 풍토에서 피감기관들이 의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외유성 해외출장을 포함한 ‘의정활동의 편의’를 제공해온 것은 불가피한 생존전략이었다. 여야는 이를 관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바로 이 대목에서 ‘김기식 사태’에 개입했다. “피감기관 지원 해외출장이 당시 국회의원들의 관행에 비춰 도덕성에서 평균 이하라고 판단되면 위법이 아니더라도 사임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감히 누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강력한 반론이었다.

김기식만의 문제 아니다

하지만 ‘피감기관 지원 출장’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국회의원의 지위남용 금지 의무’(제46조3항)와 늘 부딪힐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다. 경계가 모호할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법의 취지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용인하거나 무마해버리면 선출권력의 자율적 절제를 바탕에 깔고 있는 법 조항의 생명력도 사라지고 만다. 사실, 국회의원이 다른 기관이나 기업 돈으로 해외에서 공무를 봐야 할 이유나 명분을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국회의원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김기식에 대한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뿌리 깊고 강하다. 대한민국 국회는 ‘정치개혁’ ‘새 정치’ ‘적폐청산’ 등의 구호를 전면에 걸고 지난 십수 년간 의원 수를 늘리고, 세비를 올리고, 보좌관 수를 늘리는 묘기를 보였다. 그러고서 ‘김영란법’은 유유히 빠져나갔다.

이제 김기식 한 사람의 사퇴로 정리할 수 없게 됐다. 국회의 오랜 적폐,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지 않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온 국회의원들의 폭주에 제동을 걸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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