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자동차시장에 불어닥친 SUV의 열풍은 고급차 브랜드도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특히 벤틀리나 롤스로이스 등 럭셔리 브랜드가 SUV를 만든다고 했을 때는 기대보다 의아하다는 목소리가 컸다. 품격있는 디자인과 안락한 승차감, 비스포크로 대변되는 맞춤식 제품구성 등 그들이 기존에 전달했던 가치가 SUV라는 카테고리에서도 잘 통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수작업으로 소량생산을 고집하던 그들은 결국 판매대수를 늘리기 위해 SUV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패트릭 키슬링 벤틀리모터스코리아 지역총괄 매니저는 브랜드 최초 SUV 벤테이가를 '비범함'이란 단어로 설명했다. 1920년대부터 꾸준히 모터스포츠에 참가하며 갈고 닦은 성능의 자신감, 소재 선택부터 생산 전 과정에서 장인들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고급스러움을 더해 비교 불가능한 규격 외 품격을 갖췄다는 자신감이다. 단순히 고급 SUV라는 틀에서 벗어났다는 벤테이가를 용인 스피드웨이 서킷에서 체험했다.

▲디자인&상품성
차체는 길이 5,140㎜, 너비 1,998㎜, 높이 1,742㎜, 휠베이스 2,995㎜로 당당한 체구다. 벤틀리 고유의 우아함과 대형 SUV 매력을 조화롭게 버무려낸 건 한국인 디자이너의 솜씨다. 지금은 현대자동차그룹으로 자리를 옮긴 이상엽 전 벤틀리 외장 및 선행 디자이너 총괄이 벤테이가의 디자인을 맡아 국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벤테이가의 디자인은 '양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대형 SUV의 당당한 체구를 갖추면서도 쿠페의 역동성을 가미해 세련된 인상을 강조한 것. 해치 도어에 트렁크 데크를 남겨 일반적인 SUV와 달리 적재 및 탑승공간 사이를 명확히 구분했다. 휠 디자인도 좌우 대칭으로 제작, 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디자인을 적용했다. 의도적으로 상반되는 요소를 하나의 차에 녹여 독특하면서도 기존에 없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한 선택이다.

동그란 4개의 LED 헤드 램프는 벤틀리를 상징한다. 이음새없이 매끈하게 제작한 앞펜더 안쪽에 램프가 자리잡고 있다. 격자형 그릴과 함께 고급스럼움을 풍긴다. 앞범퍼 아래 스키드 플레이트는 오프로드 주행을 고려한 배치다. 휠아치와 펜더, 보닛의 볼륨감은 SUV 매력을 살렸다. 날카롭고 강인한 선과 후미부의 근육질 라인은 대형 SUV도 긴장감있는 실루엣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실내는 고급 소재를 아낌없이 썼다. 가죽과 목재는 정확한 설계와 장인들의 수작업을 거쳐 꼼꼼하게 조립했다. 눈으로 보는 즐거움 이상으로 손과 몸에 닿는 질감도 고급스럽다. 버튼이나 각종 장치의 반응 하나하나 정성이 느껴진다.


전체적인 레이아웃은 '벤틀리 윙'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게 회사측 설명이다. 대시보드는 운전석 도어부터 계기판 상단, 센터콘솔을 거쳐 조수석 대시보드와 발밑 공간까지 하나의 선이 유려하게 이어진다. 널찍한 공간감과 함께 시야 확보에 도움된다. 완벽한 마감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장인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실내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단연 시트다. 쿠션감과 촉감이 어떤 주행상황에서도 운전자를 편안하게 지지해줄 것이란 믿음을 준다. 내 몸에 맞춰 22방향으로 포지션을 조절할 수 있으며, 옆구리나 요추 지지 등도 섬세하게 조절 가능하다. 마사지, 온열, 통풍 기능도 적용했다. 퀄팅 다이아몬드 스티치는 고급 가구를 보는 듯하다.


여느 벤틀리와 마찬가지로 벤테이가 역시 주문제작 방식인 '뮬리너 비스포크 시스템'으로 생산한다. 도장, 가죽, 베니어, 기타 편의품목 등을 고객이 원하는 대로 제한없이 적용한다. 외장색은 최대 90가지, 실내 카페트는 15가지, 수작업 베니어는 7가지 선택지를 제공한다. 냉장고와 고급 식기 및 보관공간, 분리 가능한 의자 등도 만들 수 있다. 브라이틀링과 협업으로 제작한 기계식 뮬리너 투르비용 시계도 고급스럼움을 강조하는 요소다. 순금으로 제작하며, 로즈 골드 또는 화이트 골드, 다이아몬드 가운데 택할 수 있다.

▲성능
벤테이가의 파워트레인은 W12 6.0ℓ 트윈터보 가솔린 엔진과 8단 자동변속기를 조합했다. 최고 608마력, 최대 91.8㎏·m, 0→100㎞/h 도달시간 4.1초, 최고시속 301㎞의 성능을 갖췄다. 구동방식은 4WD, 연료효율은 복합 ℓ당 6.1㎞를 인증받았다.


초반 가속은 부드럽고 진중하다. 굳이 가속 페달을 깊숙히 밟지 않아도 사뿐하게 거동한다. 페달을 조금 깊게 밟으면 숨겨둔 힘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최대토크가 엔진회전수 1,250rpm부터 나오기에 언제나 속도를 붙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서킷의 긴 직선구간에서도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을 여유가 없다. 속도는 말 그대로 순식간에 올라가고, 안전한 코너링을 위해 감속구간도 평소보다 길게 잡아야 했다. 거구의 SUV로 헤어핀을 탈출하기를 몇 번, 생각보다 롤링이 심하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벤테이가에 처음 적용한 벤틀리 다이내믹 라이드 시스템 덕분이다.

이 시스텝은 전기모터가 차의 거동을 제어하는 48V 전자식 액티브 롤링 제어 기술이다. 전기모터가 주행모드나 운전상황 등에 맞춰 안티롤바의 비틀림 저항을 제어한다. 주행모드 중 컴포트모드에선 승차감을 우선시하는 서스펜션 세팅 때문에 급격한 코너에선 롤링이 아무래도 심했다. 반면 스포츠모드에선 차가 최대한 그립력을 유지하며 롤링을 억제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서킷주행과 별도로 간단한 오프로드 코스 체험을 했다. 코스는 한쪽 바퀴가 공중에 뜰 정도의 험로를 지나 7도 이상의 경사면을 지나는 측사로, 마지막으로 30도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코스 등으로 구성했다. 단단한 차체와 4WD의 강인함, 내리막 주행제어장치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30도에 달하는 경사에서 브레이크를 조작하지 않아도 스스로 시속 3㎞ 정도로 안정적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고성능의 한계 또한 분명했다. 5㎞에 조금 못미치는 스피드웨이 서킷 10바퀴를 쉬지 않고 달린 벤테이가의 바퀴들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일부 시승차에선 서킷 주행 막바지에 '다이내믹 라이드 시스템 기능 이상' 경고창이 뜨기도 했다. 큰 덩치를 고성능 엔진이 밀어붙이는 동안 서스펜션과 제동장치가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났다는 증거다.

▲총평
길이 5m, 무게 2.5t을 넘는 거구로 서킷 주행을 한다고 했을 때 '굳이 왜...'란 생각이 들었다. 벤테이가에서 날카로운 코너링이나 폭발적인 순간가속을 기대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2기통 터보 엔진의 성능을 일반 도로에서 마음놓고 발휘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고급스러운 실내 마감과 힘이 넘치는 파워트레인, 다양한 편의장치 등 모든 걸 다 차치하고라도 차의 거동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주행모드에 따라 차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달라졌다. 심한 헤어핀에서도 롤링을 억제하는 실력, 30도 경사를 무리없이 올라가는 강인함, 일상 주행에서 고급 세단에 필적하는 편안함 등 '벤틀리 SUV'에 대한 기대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상품성을 갖췄다. 특히 편안함과 단단함 사이를 오가는 능수능란함이 벤테이가의 진정한 매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차의 판매가격은 3억4,900만 원이다.

시승/안효문 기자 yomun@autotimes.co.kr
사진/구기성 기자 kksstudio@auto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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