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해소 '명암'

대기업 순환출자 완전히 사라질 듯

삼성·현대차 등 순환 고리 해소에 올 8兆 필요
대규모 투자 아닌 지분 사들이는데 쓰여
전문가 "지배구조 투명해졌지만 경영권 불안"
마켓인사이트 4월11일 오후 2시45분

순환출자는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성장통’에 비유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순환출자는 기업들의 ‘생존고리’ 역할을 했다.

순환출자 시대가 저물면서 기업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고리를 끊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데다 경영권 방어막이 흔들리는 등 그림자도 짙다.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현대자동차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개입하면서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거센 순환출자 해소 압박

순환출자 해소는 문재인 정부 재벌개혁의 핵심 과제다. 여기에는 대주주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계열사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계열사끼리 돌려가며 지분을 보유하는 순환출자 구조는 한 계열사가 부실해지면 다른 계열사는 물론 그룹 전체로 부실이 전이될 수 있다는 부작용도 부각됐다. 2013년 (주)동양 등에서 불거진 부실이 순환출자 고리를 타고 동양파이낸셜대부, 동양종금증권(현 유안타증권)으로 퍼지면서 동양그룹이 해체된 사례가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해 6월 4대 그룹 경영인을 만난 자리에서 “연말까지 자발적인 재벌 개혁을 위한 모범 사례를 만들어달라”며 압박했다. 순환출자 고리를 보유한 기업들이 다급히 해소에 나선 이유다.

◆거액 들여 계열사 지분 매입

투자은행(IB)업계에서는 삼성·현대차·현대중공업·농협·영풍 등이 보유하고 있는 12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려면 8조원가량이 들어갈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주주 일가 등이 순환출자 고리인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기 위한 자금이다. 현대차는 최근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기 위해 정몽구 회장 일가가 사재를 들여 기아차 등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23.3%) 등을 매입하기로 했다. 11일 종가(26만2000원) 기준으로 사들여야 하는 현대모비스 지분가치는 5조9181억원에 달한다.

삼성도 삼성SDI가 지난 10일 삼성물산 지분 2.10%를 매각하는 등 순환출자 해소에 착수했다. 삼성SDI에 이어 삼성전기(2.61%)와 삼성화재(1.37%) 등이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3.98%를 조만간 팔 계획이다. 대주주 일가와 계열사가 삼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 지분 가운데 일부를 사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이미 순환출자를 해소한 기업들도 거액을 들였다. 현대백화점은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 등이 지난 5일 순환출자 고리가 되는 현대그린푸드(7.8%)와 현대A&I(21.3%) 지분을 1500억원에 사들였다. 대림그룹도 대림코퍼레이션이 지난달 말 오라관광이 보유한 자사주 4.3%를 370억원에 매입했다.

산업은행에 따르면 상호출자제한 31개 대기업이 올해 계획한 설비투자 규모는 144조2000억원으로 지난해(145조2000억원)보다 0.6% 감소할 전망이다. 산업계 관계자는 “설비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쏟아야 할 자금이 지배구조 개편에 쓰이고 있다”며 “순환출자를 다급하게 해소하는 게 국가경제 차원에서 득인지도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경영권 위협에도 노출

순환출자 고리가 사라지면서 일부 기업은 경영권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삼성에 이어 현대차를 겨냥한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의 공격이 대표적이다. 엘리엇은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며 주주총회 금지 가처분 등 소송을 제기했다. 2016년에는 삼성전자 지분 0.62%를 매입한 뒤 삼성을 압박했다.

엘리엇은 지난 3일 현대모비스 현대차 기아차 등 현대차 계열 3사 주식 10억달러(약 1조500억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직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삼성을 공격할 때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투자자와 연대하면 파장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추진 중인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이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순환출자 고리가 끊긴 상태에서 다른 대기업들도 언제든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재계의 우려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순환출자 고리가 사라지면서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부 주식에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인 ‘포이즌 필’ 등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순환출자

계열사 관계인 A기업이 B기업에 출자하고, B기업은 C기업에, C기업은 A기업에 다시 출자하는 원 모양의 지배구조. 대주주가 적은 지분으로도 계열사 경영권을 강화할 수 있어 대기업집단에 많이 쓰였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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