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훈의 家톡 (1) 전원으로 가야하는 이유

성인이 된 아이들
도시서는 갖지 못할
시골 생활의 경험 감사하다고 말해

그는 일반 공무원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에서 내려오자마자 잠행했다. 서울 교외 한적한 마을에 일찌감치 마련해둔 땅에 전원주택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모든 전화번호를 지웠고 죽마고우들조차 그의 자식을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다. 누구보다 화려했던 과거를 그는 왜 지우려 했을까.

“돌이켜보니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세상이 만든 잣대에 자로 잰 듯이 살아왔다. 모든 인연을 끊고 ‘나’로 다시 태어나 살다 가려 한다.” 마을에서는 그저 ‘김씨’로 통하는 그가 그렇게 사는 이유였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서울을 벗어나 전원주택에 살려면 돈키호테 같은 용기가 필요했다. 신문기자 시절 전원주택 칼럼을 쓰면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전국을 헤매던 1990년대 중반 무렵 우연히 그를 만났다. 전원주택이 드물던 시절이라 농가주택과는 결이 다른 집을 발견한 뒤 무조건 대문을 두드리고 말을 건네다가 정말 ‘결이 다른’ 그를 보고 그냥 팔을 잡고 붙들어 앉혔다. 말문을 열게는 했으나 그의 얘기를 칼럼으로 쓰지는 못했다. 그의 생전에는 글로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말문을 열게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생몰을 알지 못하지만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묵혀 둔 사연을 이제는 풀어도 될 듯하다.

충남 천안에서 한참 내려간 시골에서 작은 과수원을 하던 이도 그랬다. 세탁소를 하면서 4남매를 다 키우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자식들에게 선언하고 탈속을 감행했다.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자식들도 내려오지 못하게 했다. 두 사람의 살아온 여정이 너무나 달랐던 것에 비하면 인생의 마지막 길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한 길이었다. 그들은 왜 지나온 세월을 지우려 했을까.

나이 60에 은퇴를 하면 적게는 500개, 많게는 1000여 개 넘는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저장되지만, 그 전화번호가 10분의 1로 줄어드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는다. 그때는 그래야 했다. 그들보다 3~4년 늦었지만 그 무렵 전원생활을 시작한 필자는 너무 깊이 세상에 발을 담근 상태라 감히 탈속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덕분에 주말마다 밀려드는 객들을 대접하느라 1년이면 돼지 서너 마리를 숯불에 흠향해야 했다. 손님 접대에 지친 집사람이 한번은 손님이 오는 날 집을 나가버린 황당한 일도 있었다. 전원생활이 20년에 이르면서 깨달은 게 있다. ‘그래도 내가 인생에서 이거 하나는 건졌다’는 것.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 지금은 소나기마을(사진)로 유명해진 경기 양평의 한적한 강마을로 내려갔다. 한 학년에 한 학급뿐인 초등학교를 나와 이천, 가평을 두루 거쳐 시골학교만 맴돌다가 어느덧 군대 가고 출가하게 된 아이들은 ‘아빠, 엄마에게 가장 감사한 일’로 시골에서 키워준 것을 꼽는다. 철이 드니 그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알겠다고 한다. 중고교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대학생이 된 뒤부터 어느 순간 서울에서만 자란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들이 갖지 못했지만 무척 부러워하는 것, 그 다름이 바로 몸속의 ‘촌놈 DNA’였다.

이광훈 < 드림사이트코리아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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