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업계에서 ‘트럼프 효과’가 회자되고 있다. 지난해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의약품 관련 각종 규제를 철폐하자 신약 개발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지난해 승인한 신약은 모두 46건으로 1996년(53건) 이후 가장 많았다. 전년(22건)과 비교해서도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미국은 유럽연합(EU)과 함께 세계에서 신약 허가심사가 가장 까다롭다. 하지만 세계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신약 허가 검토기간(임상 종료 후 최종단계 심사)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 FDA는 최근 10년 새 신약 허가 검토기간을 평균 33개월에서 12개월로 단축했다. 신약 출시를 앞당기기 위한 다양한 ‘신속허가 제도’ 덕분이다. △신속심사(Fast Track) △우선심사(Priority Review) △혁신 치료제(Breakthrough Therapy) △가속승인(Accelerated Approval) 등이 대표적이다.

美·EU·中은 '신약 허가 전쟁'

치료제 개발이 시급한 질환의 신약(신속심사)이거나 기존 치료제의 효과를 개선한 신약(우선심사) 등이 대상이다. 이 중 암, 백혈병 등 기존의 중증(重症) 치료제보다 효능을 크게 높인 ‘혁신 치료제’로 지정되면 신약 후보물질 단계부터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안전성 확인만으로도 ‘선(先) 허가, 후(後) 최종임상’ 혜택을 받는다. 그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의약품 허가 절차가 여전히 느리고 번거롭다”며 “허가 속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고 FDA를 채근하고 있다.

미국발(發) ‘신약 허가 속도전’은 세계 각국의 의약품 허가 관련 규제 완화를 촉발시키고 있다. 중국은 낙후된 의약·바이오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잇따라 규제 개혁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는 해외에서 진행된 임상시험 데이터라도 일정 수의 중국인이 참가했으면 그대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2016년에는 신약 판매허가 심사기간 단축제도도 도입했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신약 출시 문턱이 크게 낮아지자 중국 시장에 잇따라 제품을 내놓고 있다. 영국 아스트라제네카는 지난해 말 폐암 치료제 타크리소의 판매 승인을 받았다. 미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은 최근 폐암 치료제 옵디보의 판매 승인을 신청했다.

일본은 ‘의약품·세포치료제 등의 특례승인’ 제도를 시행 중이다. 한국 보건의료계가 내놓았지만 사실상 사장(死藏)된 아이디어를 제도화한 것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약사심의위원회가 승인하면 임상시험이 완전히 끝나지 않아도 의약품을 먼저 시판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의약품 출시를 더 앞당길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 나설 예정이다.

한국도 '패스트 트랙' 도입해야

의약품 규제가 까다로운 EU도 2016년 3월 ‘우선 순위 의약품 제도(EMA PRIME)’를 도입했다. 중증 환자가 신속히 새로운 치료제를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순위 의약품에 한해 임상과 신약 허가 기간을 줄여주고 있다. EU는 우선 순위 의약품 적용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신약 허가 속도전’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한국은 사실상 뒷짐만 지고 있다. 의약품 허가 행정의 초점이 ‘신속성’보다는 ‘안전성’에 맞춰져 있어서다. ‘신속 허가’에 따른 특혜 시비와 나중에 발생할지도 모를 신약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발목을 잡고 있다. 제약업계가 절박하게 제도 개선을 요구해도 수년째 관련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다. 주무 부처(식품의약품안전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정치권과 범정부 차원의 해결책 마련이 시급하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