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턱을 올려 수레를 높인 초나라 손숙오
복사기로 헝가리 자유화 일조한 소로스
현실 경험 없으면 '넛지'도 이해 못한다

김경준 <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

1950년대에 태동한 행동경제학은 인간행동의 경제적 동기와 심리적 기제를 융합해 경제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2017년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면서 다시금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베스트셀러 《넛지》로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그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설파한다. 더 나은 선택을 유도하기 위해 금지와 명령이 아니라 팔꿈치로 옆구리를 툭 치는 듯한 부드러운 권유로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접근이다. 행동경제학은 20세기 후반에 합리적 인간에게서 관찰되는 감성적이고 비합리적 선택의 배경을 이론적으로 규명했지만 실제 역사는 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행동이란 경제적 인센티브와 감성적 심리의 결합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남방의 후진국이던 초나라는 기원전 7세기 장왕(楚莊王)대에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양자강 유역의 광대한 습지를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해 농지로 전환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북방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제도를 정비한 결과였다. 장왕을 도와 부국강병을 이룬 재상 손숙오는 유능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순리를 따르면서 백성들에게 규율을 강요하지 않는 정책 추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시 수레는 전쟁 시에 전차로 전환되는 전략물자였다. 전투에 적합하지 않은 낮은 수레의 유행을 우려한 장왕은 높이를 올리라는 명령을 내리려 했다. 그러자 손숙오가 건의했다. “아래로 영을 너무 자주 내리면 백성들이 무엇을 따라야 할지 모르니 안 될 일입니다. 왕께서 꼭 수레를 높이고 싶다면 마을 앞의 문지방을 높이시지요.” 손숙오의 의견을 따르자 반 년 만에 수레의 높이가 모두 올라갔다. 그는 사안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오르내리기 편해 선호하는 낮은 수레는 말에게 부담을 주고 야전에서 전차로 사용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편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왕의 명령만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렵기에 강제로 수레를 높이려 하지 않고 낮은 수레를 타고 다니기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을 문지방을 높이기는 쉽기에, 쉬운 일로 어려운 일을 처리한 소위 ‘넛지’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일당독재 체제는 외견상 강고해 보여도 실제로는 매우 취약하다. 개인적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명령과 배급제를 기반으로 선전선동에 의존하는 체제의 특성상 내부적 모순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언론 통제와 비밀경찰을 전위부대로 유지했지만 내부적 균열로 붕괴된 소련과 동유럽 공산국가의 역사가 이를 웅변한다. 헝가리는 1989년 10월, 40년간의 공산주의 일당독재를 마감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 출신 세계적 펀드매니저인 조지 소로스의 공헌이 지대했다. 1930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소로스는 2차대전 후 공산치하를 떠나 영국으로 이주했다. 가난한 이민자로서 철도역의 짐꾼, 웨이터 등을 전전하며 학업을 마치고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가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뒤 평생 320억달러를 다방면으로 기부했다. 성장기에 경험한 나치와 공산당 통치를 통해 전체주의 체제 약화의 핵심을 정보 유통의 확대로 이해하고, 1984년부터 헝가리 각지의 대학과 도서관에 복사기를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공산당이 출판과 언론을 통제하는 체제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피해 암암리에 돌려보던 소량의 자유민주주의 관련 서적과 유인물들이 기증된 복사기를 통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공산체제는 급속히 약화됐다. 복사기 보급은 쉽지만 공산체제의 정치적 변화는 어렵다. 작은 변화로 큰 변화를 유도한 사례다.

행동경제학의 ‘넛지’를 한의학에 비유하자면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급소에 해당하는 혈(穴)이다. 인간과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를 위해 혈을 정확하고 부드럽게 자극하되 자유로운 선택을 방해하지 말라는 접근이다. 이는 백면서생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생동하는 현장에서 실질적 경험을 쌓으면서 체득하는 세상살이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에 기반한다. 춘추시대 초나라 토목기술자 출신 손숙오와 현대의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는 이런 측면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현실의 경험이 없으면 ‘넛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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