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 딜레마'에 빠진 정부

"부실 기업도 민심 반대하면 정부가 지원" 신호로 읽혀
30만 일자리 앞세운 GM… 정부 고강도 압박 전략 짠듯

지원여부 놓고 정부 '딜레마'
정무판단 내릴 청와대 '나 몰라라'

한국GM 노동조합원들이 14일 전북 군산공장에서 공장폐쇄 결정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GM은 지난 13일 경영 악화를 이유로 군산공장을 폐쇄한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등 강공을 펴는 것과 관련해 ‘구조조정 때 산업계 의견과 지역 민심을 적극 반영하겠다’고 외친 정부가 자초한 화(禍)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 민심이 들끓으면 부실 기업이라도 정부가 지원해 살리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돼 이를 역이용한 GM의 전략에 휘말렸다는 관측이다.

GM과 정부 간 기싸움에서 총대를 메고 나서는 주체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 관계부처 실무자들이 매일 대책회의를 열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 실무자들은 청와대 눈치만 보고 있다. 한 관계자는 “‘먼저 나섰다가 욕먹지 않겠다’며 서로 눈치만 보는 형국”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태를 초래한 근본 원인인 국내 자동차산업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는 손도 대지 못한 채 정부가 GM에 두 손을 들고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한다.

정부 ‘노조 눈치’ 보느라

GM의 한국 철수설은 몇 년 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GM이 2002년 대우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산업은행과 맺은 주주 간 계약(국내 자산 처분 제한)이 지난해 10월 끝나면서 철수설은 전면으로 부상했다. 정부는 줄곧 외면했다. 작년 12월에서야 구조조정 컨트롤타워인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새로운 구조조정 원칙을 내놨다. 금융 논리와 함께 산업 측면을 고려하고, 지역사회 의견도 적극 듣겠다고 했다. 금융 논리만 고집하다 2016년 STX조선해양과 한진해운을 잇따라 파산시켰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었다.

정부의 새 구조조정 원칙은 ‘부실 기업이라도 산업계와 지역사회가 반대하면 사실상 정리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로 읽혔다는 게 채권은행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GM 역시 지역 민심을 이용해 정부를 압박한 뒤 지원을 받아내는 전략을 짰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 채권은행 관계자는 “게임에서 먼저 패를 깠다가 화를 자초한 꼴”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입김이 세진 노동계 요구를 대폭 수용하며 자동차산업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오랫동안 방치한 것도 한국GM 철수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낮은 생산성과 고임금 구조에서 노동계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는데 한국GM뿐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철수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총대 메는 부처 없어

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지역 민심 반영 원칙에 따라 무턱대고 지원했다간 ‘국민 세금으로 부실 외국 기업 배를 불리느냐’는 지적을, 그렇다고 지원을 거부하면 ‘30만 일자리를 날렸다’는 비판을 받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부처도 없다. 한진해운 파산 책임을 뒤집어썼던 금융위는 전면에 나서길 꺼리고 있다. 경제팀을 이끄는 기재부는 “산업부가 주무부처”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정작 산업부는 구조조정을 추진할 실질적인 도구가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새다. 한 구조조정 전문가는 “정부 구조조정 라인에 경험 있는 칼잡이가 없다”며 “손에 피 묻히는 큰 수술보다는 연고 바르고 반창고만 붙여서 지방선거가 끝날 때까지만 시간을 끌어보려는 게 정부의 심산”이라고 지적했다.

고도의 정책적, 정무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청와대는 “부처가 책임지고 대책을 세워라”며 뒤로 빠지는 분위기다. 정부 한 관계자는 “이 정도의 큰 일이 터지면 청와대 주도로 장관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강구하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은 청와대 주재 회의는커녕 장관 회의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지금까지 수수방관한 것도 청와대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지금부터라도 분명한 원칙을 세워 대응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채권은행 관계자는 “한국GM이 고비용 구조를 고치고 경쟁력을 높이려는 강도 높은 자구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결코 지원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며 “연명을 도와주는 형태의 지원은 철수로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규/이태훈 기자 black041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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