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디지털·공유경제 입혀
'지식 라이브러리' 로 대변신
100년 전통 깬 '출판계 이단아'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eejh@hankyung.com

미국 최대 교과서 출판사인 센게이지가 교과서의 ‘공유경제’ 시대를 선언했다. 센게이지는 지난달 5일 ‘센게이지 언리미티드’로 불리는 구독서비스를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이 학기나 학년별로 일정 금액을 내면 센게이지가 제공하는 전체 디지털 자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서비스다. 해당 서비스는 올해 가을학기부터 이용 가능하다.

‘교육업계 넷플릭스’ 꿈꿔

센게이지의 디지털 혁신 뒤엔 마이클 E 한센 최고경영자(CEO)가 있다. 그는 센게이지를 ‘고등교육업계의 넷플릭스’로 만들고 싶어 한다.

센게이지 언리미티드를 구독하는 학생들은 센게이지의 모든 디지털 자료를 볼 수 있다. 구독료는 학기당 120달러(약 13만원), 1년에 180달러다. 넷플릭스(월간 구독료 8~14달러)만큼 싸진 않다. 하지만 미국 대학생이 2016학년도 교과서 구입비로 평균 579달러를 쓴 것을 감안하면 매력적인 가격이다.

한센 CEO는 “교과서의 디지털 구독 모델은 지난 100년의 출판업계 전통을 깨는 일”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학생들에게 일부 책과 자료만 팔려는 게 아니라 한 번의 구독으로 센게이지 전체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센게이지는 2020년까지 미국 대학 교과서 비즈니스의 90%가 인쇄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바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디지털 구독 모델이 당장은 인쇄 부문의 매출 감소세를 더욱 심화시킬 순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시장을 차지할 것이라는 게 한센 CEO의 계산이다. 센게이지는 대학 교과서 부문에서 영국 피어슨에 이어 글로벌 2위다. 센게이지의 대학 출판 연간 매출은 9억5000만달러(약 1조169억원)로 전체 매출(16억달러)의 60% 정도다.

피어슨 등 경쟁사들이 개별 교과서에 대한 구독모델을 시도한 적은 있지만 전체 디지털 자료에 대한 접근을 허용한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영국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페를레고가 피어슨, 옥스퍼드대학출판, 블룸스버리 등의 온라인 자료를 묶은 구독서비스를 출시하는 등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한센 CEO는 “기업들이 고유의 사업모델에 빠져 있는 동안 넷플릭스 같은 신생 회사들이 들어와 기존 시장을 파괴하고 엄청난 이익을 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산 상태에서 기사회생

한센 CEO는 2012년 9월 파산 위기에 놓인 센게이지에 ‘구원투수’로 합류했다. 미국 최대 교과서 출판사도 출판업계 불황을 피해갈 순 없었다. 센게이지는 2013년 7월 챕터11(파산보호)을 신청하고 재무제표상 40억달러가량의 부채를 청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센 CEO는 “챕터11 결정이 전통적인 인쇄사업 모델을 디지털 교육 사업으로 전환하기 위한 자본구조를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센게이지의 전신은 톰슨러닝이다. 캐나다 톰슨미디어그룹 자회사였으나 톰슨과 로이터 간 합병 과정에서 매물로 나왔다. 2007년 사모펀드 아팍스파트너스와 오머스캐피털파트너스(온타리오시립공무원퇴직연금의 프라이빗에쿼티사업부)가 77억5000만달러에 톰슨러닝을 인수했다. 이때 회사명을 센게이지러닝으로 바꿨으며 2016년 다시 센게이지로 단순화했다.

센게이지는 인수합병(M&A) 전략으로 사업을 키웠다. 2008년 호튼미플린하코트의 대학 출판사업부를 7억5000만달러에 인수했다. 같은 해 웹기반 교사 훈련프로그램인 가틀린에듀케이션서비스와 유료 신문 검색엔진 하이빔리서치를 사들였다. 2011년엔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디지털 및 학교출판부를 인수해 글로벌 ELT(영어교육)사업과 합쳐 내셔널지오그래픽러닝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출판업계 불황이 닥치면서 M&A를 통한 사업 확장은 회사를 자금난에 빠지게 했다.

디지털 기업으로 변신

한센 CEO의 말은 현실이 됐다. 센게이지가 2014년 4월 챕터11을 졸업한 이후 디지털 기업으로의 변신을 본격화한 것이다. 2015년 학습관리시스템 러닝오브젝트와 학습·취업 포트폴리오서비스인 패스브라이트를 인수했다. 2016년엔 교사와 학생들에게 온라인 학습 자료를 제공하는 웹어사인을 사들였다. 센게이지는 2016회계연도에 디지털 사업부 매출이 교과서 출판 부문을 뛰어넘는 이정표를 세웠다. 센게이지 교육 서비스는 현재 125개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40개국에 해외 지점을 두고 있다. 본사는 미국 보스턴에 있다.
한센 CEO는 센게이지 영입 이전부터 맡은 사업마다 기존 사업 전략을 혁신시키는 ‘변신의 귀재’로 통했다. 기업경영 컨설턴트로 오래 일한 경험 덕분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 본대학에서 법학석사를 받은 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다. 첫 직장은 뉴욕의 보스턴컨설팅그룹이었다. 그는 여기서 11년을 일하면서 파트너 겸 국제 미디어사업부 회장까지 승진했고, 헬스케어사업부에서도 고위직을 맡았다. 이후 독일 미디어회사 베텔스만의 운영수월성 부문 수석부사장으로 영입됐다.

그는 2006년 의학·과학 분야 정보기업인 엘스비어(Elsevier)의 자회사 하코트어세스먼트 CEO로 발탁됐다. 마이너스 실적을 내던 회사를 높은 이익을 내는 구조로 탈바꿈시켰다. 2008년 다른 계열사인 엘스비어헬스사이언스 CEO로 옮겨가선 인쇄출판 사업모델을 디지털 방식으로 성공적으로 전환했다.

한센 CEO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속한 전략적 평가와 냉철하고 현실적인 실행력이 그 비결로 꼽힌다. 또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문화부터 바꾸는 것을 강조한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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