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은 국가경영을 위임받은 '대리인'에 불과
'자문위' 형식 빌려 국민 뜻 오역하지 말고
개헌으로 국체(國體) 흔들 수 있다는 생각 버려야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dkcho@mju.ac.kr >

빌 클린턴은 “바보야, 중요한 것은 경제야(It’s economy, stupid)”라는 촌철살인으로 민주당 후보로는 12년 만에 미국 제4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국민의 지지로 백악관에 들어가지만 4년 임기 동안의 백악관 임차인일 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그는 미국을 뜯어고치겠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의 전통과 가치를 존중하고 미국에 봉사하겠다고 했다. 그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민주 사회에서 정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은 선거를 통해 국가경영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 정권이 국가 위에 있을 수 없으며 정권이 국민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과 문화는 다르다. 국가와 정권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정권 스스로 자신을 국가로 인식하고 국민도 이를 용인한다. 따라서 집권하면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다고 여긴다.

이 같은 사고의 뿌리는 무엇인가. 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적고 있다. 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니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민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수많은 국민이 주인 된 권리를 일관되고 명확하게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의 뜻이 정치적 편의에 따라 ‘우상화’되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단화’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국정 전면에 포진된 적폐청산과 개혁을 곱씹어 봐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위원회 공화국’을 방불케 하는 원전 공론화위원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등을 필두로 설치된 각종 자문위원회의 적법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은 이들 위원회에 막중한 국정운영을 위임한 적이 없다.

프랑스 헌법의 안전장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헌법은 제3조 1항에서 ‘국가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은 대표자나 국민투표를 통해 국가 주권을 행사한다’고 기록한다. 주권재민을 선언하면서 그 행사 방식을 구체적으로 ‘대표자’와 ‘국민투표’로 한정하고 있다. 2항은 ‘국민의 일부나 특정 개인이 주권 행사를 특수하게 부여받을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헌법 기준에 따르면 국체(國體)를 흔들 수 있는 각종 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은 그 자체가 위헌이다.
물론 개헌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명분, 논리, 절차와 통로가 중요하다. 정부의 공식 기구도 아닌 ‘자문위’에서 자문 형식을 빌려 개정헌법의 골격을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접근이다. 개헌을 한다고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헌을 하더라도 지켜야 하는 일종의 금선(禁線)으로 ‘내재적 한계’가 존재한다. 국가체제의 본질적인 부분은 고칠 수 없다. 예컨대 공화정을 왕정으로 바꿀 수는 없다. 국민의 기본권을 축소하는 개헌은 불가능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개헌도 마찬가지다. 지난 1일 공개된 국회개헌특위 자문위원회 초안은 체제의 경계를 넘나들어 그 자체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다.

헌법 전문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 실현’으로 대체했다. 제4조에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에서 ‘자유’를 삭제했다. 민주적 기본질서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같을 수는 없다. 경제 분야는 더욱 심각하다.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고 정리해고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며 노조의 경영 참여를 보장했다. 이는 세계적 추세인 노동시장 유연화에 역행하는 처사다. 경제는 정치와 달리 생존이 달린 문제다. 밥그릇을 깨는 조항이 헌법에 삽입돼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오는 2월 개헌안 확정을 추진 중인 정부와 여당은 ‘자문위 개헌안’을 참고할 것이라고 했다.

정권과 국가의 관계는 경제학에서의 ‘주인과 대리인’ 문제의 압축판이다. 정권의 대리인 비용이 임계치를 넘으면 국가는 쇠망한다. 최근의 각종 위원회는 국가적 공식기구가 아니라 특수 목적의 한시적 임의조직이다. 국민이 위임하지도 않은 막중한 사무를 이들 조직이 수행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권은 바뀌어도 국가는 영속적이다. 정권은 짧고 국가는 길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객원논설위원 dkcho@mju.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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