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은 소년·소녀… 아이돌에 빠진 직장인

연애보다 연예인
워너원·방탄소년단이 곧 내 사랑
수십만원 웃돈 주고 콘서트 표 끊고
팬미팅 위해 앨범 20장 구입도

업무에 도움 될 때도
수지 좋아하는 중국 회사 담당자
사인 CD와 '굿즈' 선물했더니
이메일 답장 빨라지고 사이 좋아져
서울에 사는 결혼 2년차 직장인 김 대리는 올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부산행 기차를 탄다. 평소 좋아하는 11인조 그룹 워너원이 부산에서 콘서트를 하기 때문이다. 콘서트 표 정가는 7만7000원이지만 김 대리가 중고나라에서 구한 표값은 무려 49만원이다. 웃돈을 주고서라도 콘서트에 가겠다는 누나 팬들로 몇 번이나 매물을 놓친 뒤에야 간신히 표를 구했다. 부산까지 KTX 왕복 교통비 12만원, 크리스마스이브라는 이유로 평소보다 비싼 숙박비까지 포함하면 2박3일 들여야 할 돈이 100만원에 달한다. 김 대리는 ‘이러려고 돈 번 것 아니겠냐’는 생각에 신나게 즐기고 올 작정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부산에 가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10분쯤 ‘멘붕’에 빠졌다가 이젠 반쯤 포기한 것 같습니다. 하하.”

김과장 이대리들이 아이돌 ‘덕질(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해 이와 관련한 것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에 빠졌다. 반짝반짝한 아이돌 그룹의 사진 한 장, 달콤한 노래 가사 한 줄을 삭막한 일상 속 단비로 느끼고 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위해서라면 흔쾌히 지갑도 연다. 학창시절에도 안 해본 ‘티케팅 전쟁’에 뛰어들기도 한다. 아이돌에 빠진 김과장 이대리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ung.com

“연애 못해도 행복해요”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 김모씨는 요즘 만성 피로를 겪고 있다. 아침에 눈 뜨고 한 시간, 잠들기 전 한 시간씩 꼭 새로 뜬 방탄소년단 사진과 영상,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려서다. 하루에 서너 시간도 못 잘 때가 많지만 ‘덕질’은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잘생기고 어린 연예인들만 보다 보니 주변 이성들도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다. 연애와 결혼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난 지 오래다.

“기획사에서 제공하는 일상생활 동영상과 멤버들의 트위터 글만 찾아봐도 하루가 부족합니다. 요즘은 덕질이 일상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일상이 덕질을 방해한다고 느껴질 정도예요.”

이런 생활이 직장생활에 예기치 못한 도움을 주기도 한다. 건설사 플랜트팀에서 중국 사업 관련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최 대리는 가수 겸 배우 수지의 오랜 팬이다. 지난달 중국 현지 담당자가 국내 출장을 왔을 때는 오랜 팬 활동 덕을 톡톡히 봤다. 중국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도 수지의 팬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다. 최 대리는 집에 쌓여 있는 사인 CD와 콘서트 때 받은 굿즈(유명인 관련 상품) 중 일부를 눈물을 머금고 중국 현지 담당자에게 선물했다.

이후 싸늘했던 그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최 대리는 “중국 담당자가 ‘외국인 팬이라 팬미팅이나 콘서트 현장 굿즈를 구하기 힘들다’며 무척 고마워했다”며 “요즘은 매번 늦던 메일 답변도 바로바로 온다”고 말했다.

상사의 덕질은 나의 고통

본인의 덕질은 즐겁지만 남의 덕질은 괴롭다. 특히 그 주인공이 직장 상사일 때 고통은 배가 된다. 출판사에 다니는 박 대리는 매일 워너원의 강다니엘 이야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팀장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렸다.
‘프로듀스101 시즌2’ 방영 기간에는 매일 아침 직원들에게 투표 독려까지 하며 귀찮게 했을 정도다. 출근해 눈만 마주치면 “우리 다니엘이 어제는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탓에 직원들은 아침마다 팀장 눈을 피하기 바쁘다. “매일 팀장이 강다니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 그 사람이 오늘 뭐하는지 모르는 직원이 없을 정도예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그렇게 사랑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유통기업에 근무하는 정 과장과 직원들은 점심 식사 후 한 화장품 가게로 향하는 게 일과가 됐다. 2만원 이상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엑소(EXO) 콘서트 초대권을 준다는 행사 때문이다.

엑소 멤버들의 얼굴도 구분하지 못하는 정 과장이 화장품 가게에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하는 것은 팀장의 딸 때문이다. 지난 엑소 콘서트 표 예매 당시 전 부서원이 티케팅에 도전했지만 처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후 팀장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남의 일이라고 대충 한 것 아니냐”는 핀잔부터 “딸 얼굴을 못 보겠다”는 한탄까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직원들이 합심해 화장품을 사들이게 된 이유다.

딸 위해 앨범 20장 구입도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위해 쓰는 돈을 결국 나를 위한 투자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가끔은 연예인의 존재가 ‘돈을 버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팬들 사이에서 직장인이 ‘큰손’으로 불리는 이유다.

지방 공기업에 근무하는 김 과장은 지난달 워너원 멤버 박지훈 팬클럽의 모금활동에 30만원을 쾌척했다. 팬클럽 회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 이름으로 어린이 재활병원에 1000만원을 기부하는 데 동참한 것이다. 요즘은 대중에게 착하고 바른 이미지로 비쳐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 김 과장의 생각이다. 그는 “명품 등 선물을 보내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기부금을 모아 전달하는 게 연예인 이미지에도 좋고 보람도 있다”며 뿌듯해했다.

중견 식품회사에 근무하는 차 대리는 휴일마다 시내 지하철 역사를 누비고 다닌다. 홍대, 명동 등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리는 지하철역에 자신이 좋아하는 레드벨벳을 홍보할 만한 광고판을 찾기 위해서다. 차 대리는 “대학생 때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콘서트장에 가는 게 전부였는데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에게 눈에 보이는 선물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통 큰 구매력 때문에 가끔 ‘호갱’(어수룩해 이용하기 좋은 손님)이 되기도 한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최 과장은 최근 방탄소년단 광팬인 딸을 위해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 앨범을 20장이나 샀다. 방탄소년단 팬사인회에 가기 위해선 앨범 발매시점에 CD를 구매해야 장당 1회의 팬사인회 응모권이 생겨서다. 그제야 그는 CD판매량 1000만 장 시대가 다시 열린 배경을 깨달았다.

하지만 ‘물량 공세’에도 불구하고 방탄소년단 팬사인회 당첨에는 결국 실패했다. 피 같은 20만원을 쓰며 앨범을 사주고도 우는 딸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김건모 앨범 이후 처음 산 CD가 방탄소년단 앨범이에요. CD 판매와 팬사인회를 연동시키는 아이돌 소속사의 상술에 말문이 막혔습니다. 돈 주고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니…. 연예인 팬 활동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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