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린 돈 165만원으로 창업
중국 최대 화학회사로 키워
글로벌 기업 쓸어담는 'M&A 대왕'

최근 몇 년 새 중국 기업들의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계 리조트체인 클럽메드, 미국 최대 극장체인 AMC엔터테인먼트, 스위스 기내식업체 게이트그룹 등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중국 기업 손에 넘어갔다. 미국 호주 유럽 등에선 ‘차이나머니’ 경계령까지 내려졌다. 중국 기업들의 공격적인 M&A로 자국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자 이를 규제하는 움직임이 나타난 것이다.

중국 기업의 해외 M&A 중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작년 2월 발표된 중국 최대 화학회사 켐차이나의 스위스 농약·종자기업 신젠타 인수였다. 인수 금액이 430억달러(약 52조원)로 중국 기업의 해외 M&A 역사상 최대 규모였기 때문이다. 이 M&A를 이끈 주인공은 런젠신(任建信) 켐차이나 회장(59)이었다.

165만원으로 회사 설립해 M&A로 성장

중국 최대 화학회사인 켐차이나는 100여 개에 달하는 중국 중앙 국유기업 가운데 하나다. 런 회장은 2004년 회사 설립 때부터 켐차이나를 이끌고 있다. 런 회장의 별명은 ‘중국 M&A의 대왕(大王)’이다. 그만큼 많은 M&A를 진두지휘했다.

간쑤성 란저우 출신인 런 회장은 런저우대에서 경영학(학사)과 경제학(석사)을 전공한 뒤 화학기계연구소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조치 이후 중국에서 창업 열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1984년에 지인들과 함께 화학회사 란싱(藍星)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연구소에서 빌린 1만위안(약 165만원)이 전부였다. 회사 설립 이후 런 회장은 공격적인 M&A로 회사의 몸집을 불려나갔다. 1990년대 말까지 100여 개 국유기업을 인수했다. 적자상태 국유기업을 싼값에 인수해 회사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런 회장은 빼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란싱을 경영하는 동안 런 회장은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도 활동했다. 공산당과의 인연 덕분인지 란싱은 2004년 중앙 국유기업으로 지정됐다. 이런 역사 때문에 런 회장은 법적으로는 정부가 지분을 소유한 켐차이나의 최고경영자(CEO)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창업자다.

런 회장은 켐차이나를 이끌면서도 M&A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해외 기업 M&A에 적극적이었다. 2006년에 프랑스 식품첨가물업체 아디세오와 호주의 폴리에틸렌업체 퀘노스를 사들였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프랑스 실리콘업체 로디아글로실리콘을 인수했다.

공격적인 해외 기업 M&A에도 불구하고 런 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다. 그해 3월 세계 5위 타이어 제조업체인 이탈리아의 피렐리를 켐차이나가 18억유로에 인수하기로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M&A는 중국 국유기업이 단행한 해외 기업 M&A 중 2012년 중국해양석유총공사의 캐나다 석유업체 넥센 인수 이후 최대 규모였다. 이를 통해 켐차이나는 유럽 자동차 타이어 시장에 진출했다.

켐차이나는 지난해에는 스위스 원자재거래업체 머큐리아, 독일 플라스틱 고무 가공업체 크라우스마페이를 잇달아 인수했다. 딜로직에 따르면 켐차이나는 2005년 이후 지난해 신젠타 인수 전까지 150억달러(약 16조4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해외 기업 M&A에 쏟아 부었다.

중국 최고의 딜 메이커

켐차이나의 신젠타 인수 발표로 런 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AP통신 등 서구 언론들은 런 회장에 대해 “마윈 알리바바 회장이나 왕젠린 완다그룹 회장처럼 중국 부호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진 않지만 중국의 가장 중요한 ‘딜 메이커(deal maker)’”라고 평가했다.

신젠타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곡물가격 급락에 따른 실적 악화로 주주들로부터 매각 압력을 받아왔다. 미국 종자회사 몬샌토, 독일 화학회사 바스프 등이 신젠타에 눈독을 들여왔다. 런 회장은 신젠타에 주당 449스위스프랑에 회사를 인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런 회장은 최초 제안한 가격보다 7%가량 높은 주당 480스위스프랑을 전액 현금으로 지급하겠다고 다시 제안했고, 신젠타 이사회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딜이 성사됐다.

켐차이나의 신젠타 인수 소식이 알려진 직후 타일러 루커 노팅엄대 교수는 “중국의 해외 기업 M&A전략은 더 이상 ‘캐치업’ 전략이 아니다”며 “다국적 기업으로서의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기업들을 집중적으로 인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런 회장은 신젠타 인수 사실을 공식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딜은 중국과 농부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며 “나는 15세 때부터 농사일을 했기 때문에 농부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잘 안다”고 말했다.

중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경영자

런 회장은 중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경영자’다. 진리췬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초대 총재도 언론 인터뷰에서 런 회장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할 정도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런 회장에 대해 “보통의 중국 국유기업 CEO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평가한다. 공산당 당원인 중국 국유기업 CEO들은 대부분 검은색 양복에 짙은 감색 넥타이를 맨다. 겉모습이나 하는 행동이 관료들과 비슷하다. 동종 업계 민간기업이나 해외 기업 CEO들과도 거의 교류가 없다.
런 회장은 그러나 해외 기업 CEO들과도 친분이 깊고, 일찌감치 서구의 선진 경영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안드레 로제크루흐-피에트리 A캐피털 회장은 런 회장에 대해 “흡사 글로벌 투자은행 CEO와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고 평가했다.

다른 중국 국유기업 CEO들과 달리 런 회장은 중국 기업에 대해서도 종종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중국 경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려면 중국 기업들부터 먼저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 런 회장의 평소 지론이다.

켐차이나가 신젠타를 인수하기로 한 뒤 일각에선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중국 국유기업이 신젠타와 같은 글로벌 기업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이유에서다. 런 회장은 그러나 직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경제학자들은 이번 인수가 성공할 가능성을 25% 정도로 본다. 하지만 걱정 마라. 모든 게 잘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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