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경제학자 50명 설문
연구 부족에 정책 비판 '부담'

"정부 정책 비판하는 것 부담
한 번 찍히면 대외활동 차질"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캠프’에 참여했던 한 경제학자는 소득주도 성장론에 부정적이다. 경제 이론에 비춰볼 때 ‘말이 안 된다’는 이유에서다. 학계에서 검증된 이론도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공개적으로 이런 비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현 정부 정책에 관여한 다른 경제학자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경제학계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이고, 성장 정책으로 소득주도 성장론을 실험하는 나라는 세계 주요국 중 한국이 유일하다”며 “주류 경제학계가 별다른 반박을 안 하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경제학자들이 경제 현안에 침묵하고 있다. 사상 초유의 소득주도 성장 실험으로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데다 내년도 사상 최대폭의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파격적 정책이 이어지는데도 국내 경제학계에선 논쟁다운 논쟁을 찾기가 힘들다.

이런 문제점은 한국경제신문이 지난달 국내 경제학자 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설문에 응한 경제학자의 78%는 “국내 경제학계에 논쟁이 사라졌다”고 답했다. 76%는 “한국의 경제학 연구가 국내 현실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했다. 경제학자의 86%가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지만 행동은 정반대인 것이다.

다산경제학상 수상자인 정갑영 전 연세대 총장은 “정부 정책이나 경제 현안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논쟁하고 해법도 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학계에도 자성의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다. 주요 경제학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학회 차원에서 현실 문제에 목소리를 내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한다. 경제학계의 모(母) 학회인 한국경제학회는 경제학자들이 한국의 현실 문제나 실증 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두도록 하기 위해 2013년부터 매년 ‘경제학 연구 우수논문’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과거보다 한국 현실에 대한 수준 높은 연구가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학계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경제학자들 스스로의 진단이다. 이번 설문에 응한 경제학자의 52%가 ‘한국 경제학자들이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고 답한 게 단적인 예다. ‘정부 정책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한 응답자는 18%에 그쳤다. 나머지는 ‘그저그렇다(보통)’는 반응을 보였다.

경제학자들은 학계에 논쟁이 사라지고, 국내 현실 연구가 미흡한 이유로 ‘한국 현실에 대한 심층 연구 부족’ ‘현실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소극적 태도’ ‘한국 문제를 연구할 인센티브 부족’ ‘한국에 관한 기초 데이터 부족’ 등을 꼽았다. 특히 응답자의 70%는 ‘한국 현실을 연구할 인센티브가 충분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경제학자도 적지 않았다. 한 교수는 “정부 비판을 했다가 ‘쓴소리 전문’이란 타이틀이 붙으면 각종 정부 위원회 활동이나 사외이사 자리를 맡기도 어렵다”고 털어놨다. 학연, 지연과 선후배를 따지는 문화에서 선배·동료 교수의 눈치까지 보느라 논쟁을 기피하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

■ 설문에 참여하신 분

◆경제학 교수=강규호(고려대) 강천(부산외국어대) 구정모(강원대) 김병연·김소영(서울대) 김용진·김정호(아주대) 김진일(고려대) 김현학(국민대) 김홍기(한남대) 김희호(경북대) 류재우(국민대) 박추환(영남대) 빈기범(명지대) 송정석(중앙대) 신은철(경희대) 신정완(경북대) 안상욱(부경대) 이두원(연세대) 이연호(충북대) 이용주(영남대) 이종연(KDI국제정책대학원) 이종화(고려대) 이현훈(강원대) 장병기(부경대) 장용성(연세대) 전봉걸(서울시립대) 전현배(서강대) 정회상(강원대) 조성진(서울대) 조홍종(단국대) 하인봉(경북대) 한순구(연세대) 허정(서강대) 홍기현·홍석철(서울대) 홍성훈(전북대)

◆경제연구소=고영선(KDI 개발연구실장) 김재훈·송인호(KDI 연구위원) 허문종(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가나다순, 익명 요구 9명은 제외

'소득주도 성장' 파격 실험 계속되는데… 경제학자들 침묵

논쟁 사라진 한국 경제학계
(1) 상아탑에 갇힌 한국 경제학계

폴리페서만 목청…대부분은 논문 매달려
"경제학 연구가 국내 현실 못 따라가" 76%
"우리 경제학 보면 조선시대 성리학 떠올라"

“해외 학술지에 실릴 논문을 쓰는 데 목을 매다 보니 한국 현실을 못 따라간다.”

“경제학자들의 소극적 태도도 문제다. 정부, 선배·동료 교수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못한다.”

국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한국 경제학계의 현실이다. 경제학자들은 국내 경제학계가 제대로 된 논쟁도 없고, 국내 현실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성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달 국내 경제학자 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다.

◆미국은 경제논쟁 치열한데…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으로 불린다. 각종 사회 문제를 경제학 이론으로 해석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학자들의 자부심도 대단히 높다. 이번 설문에 응한 경제학자의 54%는 ‘한국의 경제학 연구 수준이 세계 경제학계 흐름을 잘 따라잡고 있다’고 자평했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 경제학이 지난 15~20년 사이에 굉장히 발전했다”며 “특히 젊은 교수들은 외국이나 한국이나 수준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 참여 문제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설문에 참여한 경제학자의 86%는 ‘정부 정책이나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76%는 ‘한국의 경제학 연구가 국내 현실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답했다. 78%는 ‘국내 경제학계에 논쟁이 사라졌다’고 했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현 정부 출범 후 사상 초유의 소득주도 성장 실험이 이어지고 있지만 경제학자들이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있다는 반성이다.

증세나 복지 확대를 놓고 정치권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경제학계는 조용하다. 이런 문제가 여야 간 졸속합의로 끝나지 않으려면 국내 경제에 미치는 파장에 대한 학계의 실증연구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전직 관료는 “학자들이 현실 문제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했다.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 논란이 되는 정책이 나오면 경제학자들이 곧바로 격론을 벌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폴 크루그먼 당시 프린스턴대 교수와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가 벌인 논쟁이 대표적이다.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2014년 부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 《21세기 자본》을 펴냈을 때도 세계적으로 ‘피케티-맨큐 논쟁’이 불붙었다.

정창영 전 연세대 총장은 “우리 경제학을 보면 조선시대 성리학이 떠오른다”고 일갈했다. 경제학이 현실과 괴리돼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경제학자 78% “논쟁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경제학자들은 가장 큰 이유로 ‘한국 문제를 연구할 인센티브가 부족하다’(56%)는 점을 꼽았다. 교수 성과 평가가 해외 유명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 수를 중심으로 이뤄지다 보니 제대로 된 한국 연구가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에 관한 기초 데이터 부족’도 문제로 꼽혔다. 이수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구를 하고 싶어도 제대로 된 데이터를 못 찾을 때가 많다”고 했다. ‘현실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함께 정부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도 경제학자들에게는 부담이다. 서울의 한 유명 대학은 지난 5월 대선 직후 소득주도 성장론을 검증하는 세미나를 검토했다가 ‘없던 일’로 했다. 정권 초기 정부 정책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수도권 대학의 한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가 진영 논리에 휘둘리다 보니 폴리페서 빼고는 섣불리 나서기 힘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한국 경제학계가 한 단계 발전하려면 논문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성과 평가 방식 개선, 한국 현실에 대한 연구 집중 지원, 중장기 프로젝트 지원, 연구진에 파격 보상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외국에선 5~6년간 뛰어난 논문 한 편만 써도 스타교수 대접을 받는데 한국에선 1~2년마다 논문을 쏟아내야 한다”며 “중장기 연구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 설문에 참여하신 분

◆경제학 교수=강규호(고려대) 강천(부산외국어대) 구정모(강원대) 김병연·김소영(서울대) 김용진·김정호(아주대) 김진일(고려대) 김현학(국민대) 김홍기(한남대) 김희호(경북대) 류재우(국민대) 박추환(영남대) 빈기범(명지대) 송정석(중앙대) 신은철(경희대) 신정완(경북대) 안상욱(부경대) 이두원(연세대) 이연호(충북대) 이용주(영남대) 이종연(KDI국제정책대학원) 이종화(고려대) 이현훈(강원대) 장병기(부경대) 장용성(연세대) 전봉걸(서울시립대) 전현배(서강대) 정회상(강원대) 조성진(서울대) 조홍종(단국대) 하인봉(경북대) 한순구(연세대) 허정(서강대) 홍기현·홍석철(서울대) 홍성훈(전북대)

◆경제연구소=고영선(KDI 개발연구실장) 김재훈·송인호(KDI 연구위원) 허문종(우리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가나다순, 익명 요구 9명은 제외

이현진 기자 apple@hankyung.com

기획취재팀=주용석 경제부 차장(팀장) 김은정(경제부) 이현진(지식사회부) 김순신(금융부) 선한결(건설부동산부) 황정환(지식사회부) 기자

경제학계 현실은… "해외 학술지 논문만 알아줘, 수학·통계에 치중… 현실 외면"

국내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현실은 외면한 채 미국 관련 연구에 함몰된 데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유학생은 “미국에서 톱저널에 논문을 실으려면 주로 미국 연구를 해야 하니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미국 연구에 매달려 있다”며 “한국 관련 이슈에 관심있는 연구자들은 유학생 가운데선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유학생은 “한국 관련 이슈를 분석하면 한국인만 보니 해외에서 관련 연구가 적은 건 당연한 일”이라며 “연구의 범용성이 떨어지니 인생을 걸고 쓰는 박사 논문 주제로 한국을 잡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한국에서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한국 실정에 맞는 연구를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경제학자들조차 미국 관련 주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게 경제학계 현실이다. 국내 대학들이 사회과학논문 인용색인(SSCI)에 포함되는 해외유명저널에 얼마나 많은 논문이 실리느냐를 교수평가의 주요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400개 정도 되는 SSCI급 학술지를 등급 매겨 등재 건수에 따라 점수로 전환한다. 해외 저널 등재가 승진과 임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내 연구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은 “많은 경제학자가 미국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려고 수학과 통계를 이용한 연구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한국 경제에 대한 현실 인식이 부족하다”며 “학문이 아니라 ‘수리게임’에 치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훌륭한 경제학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현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한국 경제에 대한 연구 중 교과서에 담길 정도로 확고부동한 이론으로 자리 잡은 게 없다”며 “한국의 경제학 연구자들은 미국 등 다른 나라의 문제를, 다른 나라의 언어(영어)로 분석해야 연구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게 현실”이라고 한탄했다.

일부 유학생은 연구를 뒷전으로 생각하는 국내 대학의 풍토를 문제로 꼽기도 했다. 퍼듀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한국 대학원에선 연구보다 고전 읽기 등 이론에 치우친 교육이 많았다”며 “연구실적보다 교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의미 있는 한국 경제 연구가 나올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기획취재팀=주용석 경제부 차장(팀장) 김은정(경제부) 이현진(지식사회부) 김순신(금융부) 선한결(건설부동산부) 황정환(지식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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