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윤 시인의 새로 쓰는 '섬 택리지'

모세의 기적? … 여긴 아예 바다가 사라졌다!…'갯벌 섬' 가란도엔 自然 닮은 할머니가 살더라

<9> 이야기를 품은 섬 압해도·가란도

섬들은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다. 비록 볼품없거나 이름이 없어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의 샘이 마르는 법이 없다.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와 가란도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도 놀라운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한때 장보고를 이어 해상을 좌지우지했던 능창 장군의 이야기부터 당시 가장 강대한 제국 몽고군을 물리친 압해도 주민들의 이야기까지. 그 때문에 그렇게 많은 섬을 다녀도 섬이 늘 그리운가보다.
능창장군의 전설이 숨어 있는 압해도

신라시대 말 동아시아의 해상왕 장보고가 문성왕이 보낸 자객 염장에게 암살당한 뒤 청해진(완도)에 살던 주민은 모두 섬에서 쫓겨나 벽골군(김제)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그렇게 서남해 바다의 해상 세력은 한동안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하지만 50여 년 뒤 후삼국 시대 말, 장보고를 이은 해상세력이 정체를 드러냈다.

‘수달’이란 별칭으로 불린 능창 장군이다. 능창은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의 아버지이자 나주 호족인 다련군 오씨 등 서남해 해상 세력 대부분이 왕건에게 투항할 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해상세력의 핵심인물이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능창과 정면 대결을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압해현 도적의 우두머리 능창은 섬 출신으로 수전에 능하여 수달(水獺)이라고 불렸다 … 태조가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서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도적의 무리가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승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왕건도 정면 승부를 피하고 결국 간계를 써서 능창을 포로로 잡았다.

남해에서 서해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압해도 바다에서 조업 중인 어부.

당시 궁예의 수하였던 왕건은 사로잡은 능창을 궁예에게 보냈다. 궁예는“해적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며 큰소리쳤다. 능창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어째서 왕건은 능창을 직접 처형하지 않고 굳이 궁예에게 보냈을까. 서남해상 섬들뿐만 아니라 후백제 지역 주민들에게도 그만큼 능창의 영향력이 컸다는 반증이 아닐까. 굳이 신망받는 능창을 제 손으로 죽여서 원망을 들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은 자신이 세우고 피는 궁예가 묻히게 했던 것이다. 장보고를 잇는 서남해 해상세력의 수령 능창 장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섬이 바로 신안의 압해도(押海島)다. 압해란 바다를 제압한다는 뜻이니 얼마나 큰 이름인가. 지금은 목포와 다리로 연결된 인구 6000명의 소읍에 불과한 섬이지만 압해도는 한때 왕건과 궁예에게 대적할 정도로 강력한 해상 세력의 근거지였다.

정승동에 있는 ‘압해정씨(丁氏) 시조’ 정덕성 묘

몽고군을 물리친 압해도 주민들

고려 말에는 세계 최강의 몽고군이 압해도를 점령하려다 실패한 적도 있다. 몽고는 1231년 살례탑(撒禮塔) 부대의 침략 이후 1259년 강화가 이뤄질 때까지 29년 동안 6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 1232년 장기 항전을 준비하며 고려가 수도를 강화로 옮겼다. 육전에는 강했으나 해전에는 약했던 몽고의 약점을 계산한 것이었다. 내륙을 장악한 몽고는 바다 길을 통해 강화도로 들어가는 남부지방의 세곡 등 보급로를 차단한 뒤 고려를 항복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서 남해에서 서해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압해도를 공격해 점령하고자 했다. 몽고는 1243년 압해도를 공격했다. 하지만 압해도가 어떤 섬이던가. 압해도 주민들이 관군과 함께 대포 등을 동원해 강력히 항전했다. 결국 몽고군 전함 70여 척의 공격을 물리치고 압해도를 지켜냈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 등에 기록이 나오고 압해도의 송공산성과 인근 고이도 왕산성 등에서 유물의 출토로 증명됐다.

송공산성은 삼한시대 이전에 축조한 산성지인데 초기 백제의 주요 거점이던 풍납토성에 견줄 만한 규모다. 압해도 해상세력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유적이다. 압해도의 가룡리에 있는 정승동 또한 압해도를 상징할 만한 공간이다. 정승동은 압해정씨(丁氏) 도선산(시조묘) 일대를 말하는데 당나라 때 대승상을 지낸 압해정씨 시조 정덕성과 그 자손들의 묘역이다. 정승동이란 가문에서 정승이 많이 나왔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을 비롯해 정일권 전 국무총리, 정래혁 전 국회의장,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정덕성의 후손이다.

광활한 갯벌이 숨 쉬는 가란도

섬에서 또 섬으로 건너간다. 가란도는 압해도에 딸린 작은 섬이다. 압해도 남단 분매리와 인도교로 연결돼 있다. 1.612㎢의 땅에 46가구, 60여 명의 사람이 살고 있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이라 봐야 74.5m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구릉과 평지다. 섬에는 벼농사도 제법 있지만 광활한 갯벌에서 나는 산출이 크다. 낙지, 감태, 석화, 바지락, 대롱이(모시조개)가 주요 생산물이다. 예전에는 꼬막도 많이 났지만 요즘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김 양식으로 큰 소득을 올렸다. 김양식 덕에 부자 섬 소리를 듣기도 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김 양식을 하지 않는다. 압해도와 연결된 인도교를 건너면 바로 섬 둘레길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도로를 따라가면 바로 마을로 통하지만 둘레길은 작은 산 하나를 넘어 들판과 해변을 따라가는 길이다.

낙지와 감태, 석화, 바지락, 모시조개 등이 풍부한 가란도 갯벌에서 작업 중인 주민들.

그래 봐야 마을까지는 30분이면 족할 정도로 작다. 둘레길은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로다. 산길을 내려와 들길을 따라 걷다 보면 드넓은 갯벌이 펼쳐진다. 가란도는 갯벌의 섬이다. 하루 두 번, 모세의 기적보다 더한 기적이 일어나는 곳, 갯벌. 썰물의 시간이면 드넓은 바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광활한 갯벌이 나타난다. 가란도 갯벌에서는 잠깐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따위는 기적 축에도 끼지 못한다.

갯벌을 돌아 마을에 들어서니 큰 무화과나무가 있는 집 마루에 주인 할머니가 고구마 순 껍질을 벗기고 계신다. 마당 수돗가 바가지에는 대롱이 조개가 담겨져 해감 중이다. 대롱이국은 해장국으로 최고다. 대롱이든 뭐든 조개는 해감을 시켜서 모래나 펄을 뱉어내게 한 다음에야 식용이 가능하다. 해감을 잘하기 위해서는 조개를 담아놓은 물에 쇳덩이를 넣으면 도움이 된다고 할머니가 알려주신다. 숟가락이나 동전 같은 것을 넣어두면 다 뱉어낸단다. 금속 성분이 조개를 자극해서 펄을 토해내게 하는 듯하다. 대롱이 바가지에도 숟가락이 들어 있다. 할머니는 가란도 갯벌에서 낙지가 “어마어마하게 나온다”고 자랑이시다. 섬 주변을 둘러서 낙지가 나는데 목포 배들도 와서 주낙으로 잡아간다. 예전에는 밤이면 횃불을 들고 나가 낙지를 잡았지만 요즘에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낙지를 잡는다. 몇몇 할머니는 맨손으로 잡기도 한다. 낙지잡이는 3~6월 말까지 또 8~12월까지 잡는다. 겨울에도 조금씩 잡는다. 낙지는 주로 정조기인 조금 물때의 썰물에 잡는다. 가란도에서도 낙지를 볏짚 불로 구워 먹는 낙지호롱구이가 별미다. 호롱은 볏짚의 우리말이다. 살짝 쪄낸 낚지를 볏짚에 둘둘 말아 양념을 바른 뒤 다시 살짝 구워 먹는 요리다.

가란도의 별미 물김청국장.

토종 무화과의 꿀맛 같은 느낌

주인 할머니는 무안군 일로읍이 고향이다. 가란도로 시집와서 내내 살았다. “일로 월항리가 고향인디 뭐 할라고 여그까지 와버렀어라우. 일은 안 한지 몇 년 됐소. 인자 일 안 하고 살아 볼라고 그라요. 막내도 일 안 시키요 그래서. 징하게 고생해서 골병만 남았소. 일 안 해도 묵고 살 것인디 머 할라고 그 고생했는지 모르겠소. 젊은 맛에 했지. 몸 안 애끼고 일했드니 남는 것은 골병뿐입디다.” 할머니는 갯바닥이랑 땅을 기며 고생고생해서 3남2녀를 키워냈다. 10여 년 전 귀향한 막내는 고생 안 시키려고 일을 못 하게 한다. 그 징하게 일 안 해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다는 깨달음을 뒤늦게 얻은 것이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가을, 겨울이면 여전히 갯벌에서는 감태가 나온다. 감태는 김치로 담가먹는 것이 기본이다. 가란도 갯벌에서 나는 감태와 석화(굴)를 넣고 전을 부치면 그렇게 맛날 수 없다. 감태 굴전, 물김 석화 볶음도 가란도의 가을, 겨울별미다.

할머니가 길손에게는 집에서 키운 토종 무화과를 건네주신다. 무화과는 위가 아니라 아래 부분부터 껍질을 벗겨 먹는다. “무화과는 아무리 먹어도 탈나는 벱이 없어.” 토종 무화과는 작지만 다디달다. 진짜 꿀맛이다. “무화과는 다 따묵으면 베어부러. 감나무도 다 따묵으면 베어부러.” 무화과 열매는 새순에서 달린다. 그래서 열매를 따낸 뒤 강둥하게 가지를 다 잘라준다. 그래야 열매가 잘 열린다. 다시 길을 나서니 머리 허연 할머니 한분이 밭일을 하고 계신다. 87세나 되셨다는데 허리가 꼿꼿하시다. 평생을 농사짓고 갯벌에 나가 갯것을 하며 사셨는데 허리도 굽지 않고 정정하시다. 동네 분들 말씀이 아직도 갯벌에 나가면 달리기는 1등이란다. “뻘바닥에서 담박질치면 1등이요. 고기도 안 묵고 된장국이랑 밥만 묵어라우” 할머니는 18세 때 나주서 이 섬으로 시집왔다. 중매다. 그때는 “정해 준대로 안 가면 아부지한테 맞어죽었지라우.”

여신 같은 마음을 가진 섬 할머니
할머니뿐만 아니라 구십 넘은 영감님도 아주 건강하시단다. 영감님은 아직도 직접 경운기로 논밭 갈아 논농사도, 밭농사도 다 짓는다. 할머니는 육식을 안 하지만 영감님은 육식을 하신다. “영감은 인자도 농사지어라우. 아주 꼿꼿해요. 경운기 끌고 나가서 로타리도 치고, 동네서도 다 놀랜다우, 밭농사도 있고 나락도 있고. 이날 입때까지 농사만 지었는디.” 구순의 노인이 경운기 끌고 논에 나가 논을 가는데 어찌 놀랠 일이 아닐까. 친구들은 “다 여항(저승)으로 갔어라.” 친구 분들은 다들 이승을 뜬 지 오래다. “나보다 어린 사람도 다들 다 기어 다녀라우. 다들 신기하다고 합디다.” 밭일에 갯일에 허리 펴고 살 날 없었던 섬 할머니들은 다들 호미처럼 허리가 굽어서 기다시피 하거나 유모차를 밀어야 다닐 수 있지만 할머니는 허리도 빳빳하고 무거운 짐을 끌고서도 척척 잘도 다니신다.

할머니는 평생 육고기는 안 드시고 생선이나 나물만 드셨다고 한다. 그것이 허리 꼿꼿함과 연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무도 건강한 모습이 내 할머니인양 반갑다. “어쩌까라우. 우리 집에 있음 커피라도 대접할 텐디. 가다가 우리 집 감나무서 감이나 따 드시고 가시오.” 집이라면 커피 한잔이라도 대접할 텐데 미안하다고 하시며 가는 길에 할머니 집에 감나무가 있으니 감 하나 따먹고 가라고 일러주신다. 나그네는 초월적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이 있다면 이런 할머니야말로 진정 신이라고 믿는다. 이런 여신님들의 은총으로 나그네는 오랫동안 무탈하게 섬을 다니고 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할머니는 휴대폰도 없고 자신의 집 전화번호도 모른다. 여신에게 그런 문명의 이기 따위가 무슨 소용있으랴.

강제윤 시인은...

강제윤 시인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섬 답사 공동체 인문학습원인 섬학교 교장이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통영은 맛있다》 《섬을 걷다》 《바다의 노스텔지어, 파시》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