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보다 먼저 무대에 올려진 '타이타닉'
온갖 사연들이 남다른 예술적 체험 선사

원종원 <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jwon@sch.ac.kr >
“버큰헤드호를 기억하라!” 뱃사람이 아니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 문구는 재난 상황이 오면 여성과 아이들을 먼저 대피시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185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가던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드호가 좌초됐다. 승객은 630여 명에 달했지만 구명보트는 60명이 탈 수 있는 단 세 척밖에 없었다. 이에 버큰헤드호의 선원들과 함장은 배와 함께 수장되며 구명정에 오를 기회를 아이와 여인들에게 양보했다. 해난 구조에서 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전통은 이 비극적인 사건이 낳은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다.

인류 최대의 해양참사로 손꼽히면서도 ‘버큰헤드의 전통’이 잘 지켜진 사건이 있다. ‘타이타닉 침몰사건’이다. 1912년 4월14일 영국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초대형 선박 타이타닉은 당시로선 첨단의 장비와 기술력이 응집된 ‘절대 가라앉을 수 없는 배’라 불렸다. 그러나 ‘바벨탑의 저주’처럼 인간의 욕망과 방심은 예상치 못한 비극을 낳았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던 타이타닉은 한밤중에 빙산과 충돌했고 3시간여 만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타이타닉에는 선원을 포함해 총 2223명이 승선해 있었지만 당시 느슨한 규제 탓에 구명정은 1100명을 태울 수 있는 20여 척밖에 없었다. 그날 밤 목숨을 건진 이는 단 706명에 불과했다. 오직 위로가 된 것은 ‘버큰헤드호의 전통’에 따라 약자에게 생존의 기회를 양보한 고귀한 희생정신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국내에서 막을 올렸다. 뮤지컬 ‘타이타닉’이다. 공연 소식이 알려지자 애틋한 러브 스토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와 케이트 윈즐릿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잘못된 기대다. 이 뮤지컬은 영화보다 먼저 만들어진 콘텐츠다. 그래서 무대에선 영화의 줄거리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다양한 계급 간 갈등과 인간군상의 모습이 주요한 이야기로 등장한다. 사실 타이타닉호에는 1등석 승객뿐 아니라 배 아래쪽에 있어 구조의 손길이 미치기 힘들었던 2, 3등석도 있었는데 뮤지컬은 그곳에 있던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에 얽힌 사연들을 생생하게 재연했다.

이 배에 올랐던 실존인물들을 등장시킨 비극적 사건에 대한 기록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이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이다. 자극적이거나 과장된 스타일이라기보다 마치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보듯 그날의 긴박감을 간접 체험하고, 그 안에서 살아남거나 사라져버린 다양한 캐릭터들의 사연을 되새겨보는 맛이 남다른 예술적 체험을 선사한다.
뮤지컬의 눈물 나는 엔딩신이 심금을 울린다. 물 위에 부유하는 사물들과 시신들이 그날의 비극을 보여준다. 섬뜩하면서도 리얼하다.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혼란에 휩싸이는 무대 위 풍경도 명장면이다. 이리저리 소리치고 고함지르며 달려가는 배우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사건의 기록은 단 5일간의 이야기다. 숨 가쁘게 전개되는 그날의 비극에서 엿볼 수 있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용기에 얽힌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승객들에게 구명복을 입히고 빨리 갑판으로 나가라고 지시하는 장면은 우리의 ‘세월호’와 정반대 풍경이라 더욱 가슴 먹먹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색적이지만 그래서 더 인상적인, 실제 벌어진 사실을 담은 뮤지컬 작품이다.

원종원 <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뮤지컬 평론가 jwon@sch.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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