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으로 떠나는 기차여행

V트레인을 타고 바라본 가을풍경

눈을 들어보니 산이 붉게 변했다. 쌀쌀한 날씨도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삶에 찌들다 올해도 벌써 끝이 보인다. 이대로 멀어지는 가을을 보내기는 너무나 아쉽다. 여행을 통해 심신에 힘을 불어넣어 보자. 열차를 타고 아찔한 산천을 만나고, 조용한 산길을 걷는 것도 좋겠다. 가을과 겨울 사이, 그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는 자연을 찾아 떠나보자.

느릿느릿~ 가을 향해 떠나는 V트레인

고속열차 KTX의 시속은 300㎞에 육박한다. 반면 백두대간협곡열차 V트레인의 속도는 시속 30㎞에 불과하다. 더 빠른 속도를 갈망하는 현대사회에서 V트레인은 느림의 미학으로 탑승객을 맞이한다.

강원 태백시 철암역과 경북 봉화군 분천역을 오가는 V트레인의 V는 협곡(valley)을 의미한다. 이름 그대로 백두대간의 협곡과 오지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열차다. V트레인 탑승객은 느리게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영화를 보듯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자연을 천천히 볼 수 있다.

열차 안에 들어서면 옛날 열차처럼 천장에 선풍기가 매달려 있고, 한쪽에는 목탄 난로가 놓여 있다. 열차임에도 화장실이 없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도 흘러간 옛 노래다. 하지만 V트레인의 진가는 출발 후 바로 나타난다. 천장을 제외한 공간 대부분에 유리창을 설치해 눈만 돌리면 바깥 풍경이 보인다. 가을의 절정으로 향하는 단풍 물결이 눈앞을 지나고, 철길 주변에 난 억새가 손을 흔든다. 계곡을 흐르는 물과 산이 어우러진 모습을 보노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열차 내부에 등이 없어서 터널을 지날 때면 내부가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객차 안에 붙은 야광 스티커만 반짝반짝 빛을 발한다. 터널이 길 때는 신나는 음악과 레이저 조명쇼도 벌어진다.

작은 역에 산타 오셨네

V트레인은 2015년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이후 주말마다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철암~승부~양원~비동~분천역을 운행하며, 승부역과 양원역에서는 잠깐 내릴 수 있다. 작은 역이 주는 호젓함이 청량하게 다가온다.

승부역에는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시가 쓰인 바위가 있다. 1963년부터 1981년까지 18년 동안 승부역에서 근무한 역무원이 썼다고 한다. 첩첩산중에 하늘마저 좁게 느껴지는 승부역의 정경을 잘 담은 명시가 아닐 수 없다.

양원역에는 한국 최초의 민자역사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철도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기에 마을 주민들은 승부역까지 걸어가야 했다. 철길을 걷다 사고를 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 번의 민원 끝에 영동선 개통 33년 만인 1998년 4월에 기차가 양원역에 정차하게 됐다. 당시 마을 사람들은 감격해서 울고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양원역은 열차가 서기만 하는 임시 승강장이어서 제대로 된 역사가 없었다. 불편을 느낀 마을 사람들이 직접 승강장과 대합실을 만든 것이 지금의 양원역이다.

산타마을이 조성된 분천역

철암역을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V트레인은 분천역에 도착했다. 일명 ‘산타마을’로 통하는 곳이다. 원래 분천역은 무인화가 진행되던 쓸쓸한 역이었으나 2013년 V트레인과 O트레인 개통을 계기로 과감한 변신을 시도했다. 산골에 있어서 바람이 많고 춥다는 점을 고려해 ‘산타마을’로 테마를 정한 것이다.

실제로 역 주변에는 산타클로스, 루돌프, 북극곰 등의 조형물이 있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80m 길이의 짧은 레일바이크가 마련된 곳에는 여름 복장을 한 산타클로스 조형물이 있다. 크리스마스 소품을 이용한 각종 포토존도 설치돼 있다. 역사 바로 옆에는 ‘체르마트’라는 영문 간판과 알프스 설경 사진이 있다. 2013년 분천역과 스위스 체르마트역이 자매결연한 것을 기념하고자 설치한 것이다.

분천역은 입소문을 타면서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2014년 12월에는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분천역은 간이역의 설움을 딛고 지난해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되는 등 성공적인 역 리모델링 사례로 떠올랐다.

가슴 탁 트이는 ‘구름 위의 땅’

지난 9월 개통된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강원 정선과 평창, 강릉을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다. 이름은 올림픽과 정선 아리랑, 강릉 바우길을 합쳐 만들었다.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정선군과 빙상종목이 열리는 강릉시가 공동으로 참가했으며 총 9코스, 길이는 131.7㎞에 이른다.

4코스는 배나드리마을~바람부리마을~안반데기로 이어진다. 산과 송천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장관이며, 길이 평탄해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다. 4코스에 포함된 강릉시 왕산면의 안반데기는 ‘구름 위의 땅’으로 불리는 곳으로 해발 1100m 고산지대에 있다. 1965년부터 정부에서 개인의 개간을 허가하면서 화전민이 모여들었는데, 지금은 전국 최대의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로 변모했다. 안반데기라는 이름은 떡메로 떡쌀을 칠 때 밑에 받치는 안반처럼 평평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안반데기 왼쪽에는 옥녀봉(해발 1146m)이, 오른쪽에는 고루포기산(해발 1238m)이 있다. 새벽 일출을 보기 좋은 곳으로 입소문이 퍼지면서 사진가들의 추천 방문지로 떠올랐다.

멍에전망대

안반데기 주변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은 멍에전망대다. 거친 땅을 개간하면서 골라낸 돌을 모아 쌓고 그 위에 정자각을 세웠다. 거친 모양의 돌이 셀 수 없이 많은데 이곳의 열악했던 환경을 짐작하게 한다. 안반데기를 감싸 안은 대관령 자락에는 총 17개의 풍력발전소가 있다. 지구가 돌리는 바람개비는 아름다운 산세와 결합해 동화 속 정경을 연출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깃든 모정탑

올림픽 아리바우길 3코스는 구절리역~이성대~노추산~모정탑길~배나드리마을로 구성된다. 이 중 모정탑길은 3코스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모정탑에 얽힌 이야기는 거의 전래동화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색적이다. 서울 출신인 차순옥 할머니는 23세에 강릉으로 시집와서 슬하에 자녀 네 명을 뒀으나 두 아들을 잃고 남편도 병이 들었다.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돌탑을 3000개 이상 쌓으면 집안의 우환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꿈을 꾼 뒤 할머니는 1986년부터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무려 26년간이나.
주차장에서 1㎞ 정도 떨어진 모정탑으로 가는 길엔 수많은 돌탑이 있다. 마을 주민과 방문객이 쌓은 돌탑인데 할머니의 ‘진짜 모정탑’까지 연결된다. 15분 정도 걸으니 진짜 모정탑이 시작되는 곳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규모가 커서 깜짝 놀랐다. 엄밀히 말하면 ‘모정탑 단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높이 1m에 달하는 돌탑이 수백m나 길에 늘어서 있다.

모정탑의 백미는 할머니가 기거하던 움막 근처에 있다. 작은 석성(石城)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거대한 돌탑군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누가 옛 성을 이곳에 지었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을 판이다. 여자 혼자 한 일이라기엔 너무 거대한 작업이다. 반면 할머니의 움막은 초라한 편이다. 돌탑마다 다른 이름과 생년월일이 쓰여 있는데 다른 사람의 안녕도 기원한 흔적이란다. 탑마다 깃든 그 정성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모정탑은 2015년에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할머니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부디 하늘에도 닿았기를 기원하며 하산하는 길에는 큰 감동도 함께했다.

여행팁

V트레인은 레츠코레일 홈페이지 또는 코레일톡 앱(응용프로그램)에서 예약할 수 있다. 요금은 분천~철암 노선이 8400원이다. 평일 1~2회, 주말 3회 운영되므로 미리 시간표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노추산 모정탑길은 걷기가 쉬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다녀올 수 있다.

가을이 아니라도 사시사철 인기 있는 길이다. 강원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산 716.

김명상 여행작가 terry@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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