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일본 제조업 신화…분식회계·품질부정 잇따라

무자격자가 안전 검사한 닛산자동차
부정 적발 뒤에도 배짱 생산

회사 위한다는 '곰팡이형 부정'
고베제강·도시바 등 대표기업 자행
'집안 수치는 드러내지 않는다'
일본 특유의 가치관이 화 키워

사이카와 히로토 닛산자동차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9일 일본 요코하마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요코하마AFP연합뉴스

일본 기업의 ‘품질 신화’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다. 도시바와 후지제록스의 분식회계에 이어 다카타, 고베제강소, 닛산자동차 등 일본 제조업을 대표하는 기업에서 제품의 품질 부정과 관련한 각종 스캔들이 터지면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무자격자가 신차 안전검사를 한 사실이 적발된 닛산자동차는 부정이 발각된 뒤에도 시정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일본 내 전 공장의 생산을 멈추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일본 제조업계 상황이) 찢어진 비닐봉지와 같다”(니혼게이자이신문)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나사 풀린’ 닛산, 차량 출하 정지

20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닛산자동차는 19일부터 일본 내 전체 6개 완성차 공장의 차량 출하를 전면 중단했다. 지난달 국토교통성 조사에서 무자격자가 완성차 안전성을 검사한 사실이 드러나 116만 대를 리콜 조치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음에도 전 공장에서 시정 조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일본 도로운수차량법은 검사 자격증을 갖춘 종업원만이 차량 안전검사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닛산은 추가로 최근 한 달 동안 생산된 차량(3만4000대)의 안전성 재검사와 리콜 시행도 검토하기로 했다. 닛산은 전 공장에서 출하를 재개할 때까지 2주가량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닛산 측 해명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의 낮은 준법의식 수준과 경영진의 지시가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닛산의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태로 일본 언론들은 바라보고 있다.

닛산자동차뿐 아니라 최근 일본 3위 제철업체인 고베제강소의 제품 품질 데이터 조작 사건 등 일본 기업을 둘러싼 ‘신뢰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면서 ‘메이드 인 재팬’의 명성도 흔들리고 있다. 일본 3대 경제단체 중 하나인 경제동우회의 고바야시 요시미쓰 대표간사는 “일본 제조업에 대한 신뢰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곰팡이형 부정’에 무너진 日 제조업

닛산과 고베철강소에 앞서 최근 몇 년간 도시바(회계부정), 다카타(불량 에어백 판매에 따른 파산), 미쓰비시자동차(연비 조작), 후지제록스(회계부정) 등 일본을 대표하는 제조업체가 잇달아 부정에 연루된 것을 두고 일본 언론은 “‘곰팡이형 부정’에 일본 제조업이 썩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 회사 조직 전체에 품질 조작 문화가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것이다. 서구 기업에서 경영진이나 직원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횡령·회계조작 등을 일삼는 ‘좀벌레형 부정’과 달리 회사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곰팡이형 부정’이 일본 기업의 문제라는 설명이다. 닛산은 무자격자에 의한 차량 안전검사가 20년 전부터 이어져온 사실이 드러났고, 고베제강소는 40년 전부터 데이터 조작이 암암리에 이뤄졌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두 회사 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2008년 철강 관련 10개 업체가 스테인리스강관 수압시험 데이터를 집단으로 조작한 사건, 2014년 미쓰이스미토모건설이 요코하마 아파트 기초지반 데이터를 조작한 사건, 2015년 도요고무공업의 면진고무제품 데이터 조작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 주간 닛케이비즈니스는 “좀벌레형 부정은 살충제를 뿌리듯 부정행위를 한 개인을 처벌하면 되지만 곰팡이형 부정은 비리가 확산된 근본 원인을 찾아 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의 눈’의식하다 병 키워

타인의 평판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일본 특유의 문화가 문제를 키웠다는 지적도 나온다. 신흥국의 대두로 일본 기업이 더 이상 경쟁우위에 설 수 없는 환경이지만 여전히 과거의 ‘세계 1등’에 집착하면서 현실과 목표 사이의 간극이 커졌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각종 부정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 주간지 다이아몬드는 ‘세계 1등’ ‘세계 최초’에 집착하는 문화가 기업 경영자들이 눈에 보이는 지표와 실적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자연스럽게 경쟁력의 기반인 품질과 안전은 등한시하고 목표와 차이가 나면 데이터 조작 등으로 덮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고베제강소는 지난해에도 계열사에서 스프링용 스테인리스 구리의 강도를 속여 출하한 ‘전과’가 있지만 회사 홈페이지는 최근까지 ‘세계 제일의 품질’을 자랑하는 내용으로 도배돼 있었다. ‘가솔린차 연비 세계 1등’을 강조한 미쓰비시자동차는 연비 데이터에 조직적으로 손을 댔다. 일본 최초로 냉장고·세탁기·컬러TV를 내놓고 세계 최초로 노트북과 낸드플래시 반도체를 개발한 도시바는 ‘가장 얇은 노트북’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 등에 집착하다 분식회계로 이어지는 전철을 밟았다는 분석이다. 모리오카 고지 간사이대 교수는 “극심한 경쟁에 노출된 경영진은 현장에 과도한 책임을 부과했고, 현장에 모든 문제가 전가되면서 불상사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여기에 ‘집안의 수치는 밖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인의 가치관도 문제를 중간에 공개하고 치유하기보다 데이터 조작, 회계부정으로 감추는 것으로 나타나 자정의 기회를 놓쳤다는 진단이다.

도쿄=김동욱 특파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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