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시선으로 잡아낸 현대인의 민낯과 편견

'좋아하고…' 국립극단서 공연
여고생이 겪는 정체성 혼란
미숙함·일탈로 해석하지 않고 우리 사회 성숙의 길 물어

'옥상 밭…' 세종문화회관 무대
옥상 텃밭 고추를 계기로 도덕성 잃어가는 군상들
삶의 다양한 방식 파헤쳐

서울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오는 29일까지 공연하는 연극 ‘옥상 밭 고추는 왜’.

자신의 삶과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선 자기가 사는 시대와 사회 속을 들여다보고 동시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무대 위에 한 세상을 펼치고 현실을 투사하는 연극은 이를 위한 좋은 통로다. 올가을 서울의 공공 극장이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사회 편견과 고정관념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고생들의 이야기 ‘좋아하고 있어’, 낡은 빌라에 모여사는 사람들의 욕망과 도덕관념, 그리고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야기 ‘옥상 밭 고추는 왜’가 각각 국립극단 소극장과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무대에 올랐다.

◆사회제약 속 청소년의 자기 발견

연극 ‘좋아하고 있어’

‘좋아하고 있어’(황나영 작·김미란 연출)는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성장하는 세 여고생 이야기다. 국립극단이 제작한 청소년극이다. 2학년 혜주와 지은은 친한 친구 사이다. 혜주의 동아리 선배 소희는 혜주를 좋아한다. 혜주도 소희에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지만 혼란스럽다. 혜주는 지은에게 “난 그런 거(동성애)에 편견 없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희에 대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인정했을 때 사회가 보낼 눈초리는 두렵다.

어느 날 소희의 성적 지향이 학교에 알려지고 소희가 주변의 지탄을 받게 되면서 혜주의 내적 갈등은 극에 달한다. 소희를 향하던 손가락질이 혜주에게 옮겨올까 두려운 지은이 떨리는 목소리로 혜주에게 “넌 (레즈비언) 아니지?”라고 묻는다. 혜주는 답하지 못한다.

작품은 청소년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미성숙함이나 일탈, 통과의례로 치부하지 않는다. 멋지게 과장하지도, 가치없는 것으로 폄하하지도 않는다. 자기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표현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청소년을 섬세하게 그릴 뿐이다. 혜주는 자기를 인정하고 사회와 어떻게 관계맺을지를 고민한다. 작품은 그 고민의 절반을 세상의 몫으로 남긴다. 동성을 좋아하는 이들을 계속 ‘소수자’의 틀에 가두고 지탄할 것인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

제법 묵직한 소재를 다루지만 분위기는 무겁지 않다. 실제 여고생을 방불케하는 김미수(혜주 역) 김별(지은 역) 김민주(소희 역)의 발랄한 연기가 몫을 톡톡히 한다.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열린다.

◆서로에게 날 세운 현대인의 슬픔

연극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하며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다가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라는 고민에 맞닥뜨리는 일이다. 서울시극단의 신작 ‘옥상 밭 고추는 왜’(장우재 작·김광보 연출)에는 그런 재미가 크다.

낡은 빌라 옥상 텃밭에 304호 주민 광자가 고추를 심고 기른다. 그걸 201호 현자가 몽땅 따간다. 고마워하긴커녕 “남편도 없이 혼자 사는 년이”라며 되레 폭언을 한다. 301호 현태 눈에는 보통 일이 아니다. 그는 “아무리 고추라도 누군가한텐 살아가는 희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며 울분을 토한다. 현태 엄마는 “왜 네 억울함을 세상에 대고 푸냐”고 한숨을 쉰다.
광자가 시름시름 앓다 결국 세상을 뜬 뒤 극은 긴장감을 높여간다. 현태의 광분에 303호 동교만이 공감한다. 현태는 현자가 사과하게 만들겠다며 현자의 사생활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동교와 함께 현자가 소중히 여기는 애완견을 납치하기에 이른다. 현태의 정의감을 따라가던 관객은 점차 혼란에 빠진다.

악녀 같은 현자도 자기 삶에 책임감을 갖고 독하게 버텨온 사람임을 극은 세심하게 그린다. “여상 나와서 옆도 안 보고 살았다”며 “믹스커피도 다 돈이야”라고 동거남을 핀잔할 때,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하는 젊은이들에게 수박을 나눠줄 때, 젊은 시위대가 수박의 빨간 부분을 다 먹지 않자 자기 앞니로 싹싹 긁어먹을 때 관객은 현자에게 빠져든다.

연출은 얇은 벽을 사이에 둔 채 같은 옥상을 짊어지고 사는 빌라 주민들의 삶을 2층짜리 세련된 무대 위에 올렸다. 작가는 옳음에 의문을 던지고, 악인을 겨누던 칼날을 흐물거리게 만든다. 극은 답의 몫을 관객에게 남겨두기에 고민은 극장을 나온 뒤 삶의 공간에서 계속된다. 29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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