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외환위기 때 청와대 경제수석 지낸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

입력 2017-10-13 19:07 수정 2017-10-14 00:38

지면 지면정보

2017-10-14A9면

한국경제 창간 53주년
외환위기 20년 우린 달라졌나

"20년 전 위기탈출 급급해 개혁 제대로 못해
지금이라도 개혁 드라이브 다시 걸어야"

외환위기 원인은
외형상 외화유동성 위기였지만 본질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

정부개혁의 핵심은
시장에 대한 확고한 신뢰 갖고
정부가 할 일 안할 일 가려야 개혁 성공

한국이 직면한 위기는
기업 글로벌 경쟁력 서서히 약화
정부, 공정한 경쟁구조 만들어 줘야
지금이 위기인 줄 모르는 '인식의 위기'도 큰 문제

중국 부상 대처하려면
중국이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 갖고 '넥스트 차이나' 찾아야

사진=김범준 기자 bjk07@hankyu8ng.com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75)은 1997년 외환위기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해 2~11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하다 공직을 떠났다. 위기가 다가오는 걸 지켜봤지만, 위기를 해결하는 건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20년이 흐른 지금도 외환위기를 잊지 않고 위기의 원인과 교훈을 복기하곤 한다. 외환위기 관련 자료를 모아둔 개인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은 ‘외환위기 20년 우린 달라졌나’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지난달 28일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집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외환위기의 원인은 뭐라고 분석합니까.

“외환위기는 외형상 외화유동성 위기 형태로 닥쳤지만 본질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였습니다. 연간 200억달러가 넘는 경상수지 적자(1996년 기준), 효율성이 다한 정부 주도의 고성장 정책, 기업의 과도한 차입 경영, 국제 경쟁력 상실 같은 문제가 한꺼번에 겹쳤고 이런 구조적 취약성이 해결될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한국 경제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신뢰가 떨어졌습니다. 결국 외환위기는 신뢰의 위기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위기를 눈치채지 못했나요.

“그때도 한국 경제가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봤죠. 그래서 금융개혁과 기업개혁을 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면서 정부가 보유 외환으로 그걸 막고, 그러다 달러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식으로 위기가 올 줄은 예측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미셸 캉드쉬 당시 IMF 총재는 외환위기를 ‘위장된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위기가 개혁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인데요.

“어느 나라나 위기를 겪을 수 있어요. 영국 같은 나라도 IMF에 두 번이나 갔다왔잖아요. 문제는 위기를 극복하고 난 뒤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느냐는 건데,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이른 시일 내 탈출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위기 탈출에만 급급해 위기를 구조개혁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은 아직도 아쉽습니다. 지금이라도 외환위기의 교훈을 잊지 말고 구조개혁의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1997년 11월24일 IMF 협상단이 한국 정부와 긴급자금 지원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한경DB

▷뭐가 문제였습니까.

“외환위기 이후 이른바 4대 부문 개혁, 즉 기업·금융·공공·노동개혁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과제 선정은 제대로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개혁의 순서에 문제가 있었어요. 실제 개혁은 기업 부문을 주로 했고 금융 부문이 조금 됐어요. 그러고는 끝났어요. 노동개혁이나 정부개혁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개혁은 정말 어려운 겁니다. 기득권을 가진 쪽에선 개혁을 안 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개혁은 솔선수범이 필요합니다. 정부개혁부터 먼저 하고 노동, 금융, 기업개혁 순으로 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쉬운 것만 하고 말았습니다.”

▷개혁이 잘 안된 이유는 뭡니까.

“위기의 원인과 성격을 편견 없이 규명하고 그 과정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었어요. 오히려 정책 판단에 대해 형사상 책임을 묻고 희생양을 만드는 식으로 위기를 종결하려고 했어요. 그 결과 우리는 제대로 된 IMF 백서 하나 없는 나라가 됐습니다. 감사원 보고서나 국회 청문회 보고서는 후대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경제를 경제로 접근해야 하는데 우리는 정치적으로만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정부개혁의 핵심은 뭡니까.

“정부개혁은 공무원을 조금 줄이고 부처 몇 개를 붙였다 뗐다 하는 게 아닙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는 게 핵심이 돼야 합니다.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건 아예 일을 안 하느니만 못합니다. 과거에 비해 기업의 역할이 커졌고 세계 시장에서 경쟁이 이뤄지는데 박정희 시대에 만들어진 정부 역할을 고수하는 건 시대착오적입니다. 시장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갖는 게 정부개혁의 출발입니다.”

▷노동개혁과 관련해 정부는 1998년 설립된 노사정위원회의 틀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접근이 맞다고 봅니까.

“노사화합이 노사관계 개혁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잘못입니다.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갈등 관계입니다. 갈등을 안 만드는 게 아니라 갈등이 생겼을 때 그걸 합리적, 합법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업 투자를 확대하고 경제의 활력을 높이기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한 과제입니다.”

▷한국에 제2의 위환위기가 올까요.

“현재로선 (달러 부족과 같은) 협의의 외환위기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북핵 문제나 미국 금리 인상으로 외화자금이 일시적으로 대거 빠져나갈 수는 있지만 외환보유액이 지난 8월 말 기준 3848억달러, 세계 9위이고 거시경제도 그런 차원에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현재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뭐라고 생각합니까.

“첫째, 경쟁력의 위기입니다. 외환위기 때 같은 달러 부족은 아니지만 경쟁력이 서서히 침하되고 있잖아요. 삼성전자처럼 경쟁력이 있는 기업도 있지만 그런 기업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둘째, 지금이 위기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인식의 위기입니다. 외환위기 때는 위기가 외부 충격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에 대응이 쉬웠지만 지금은 위기가 구조적으로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현재 한국은 요소 투입형 성장의 한계, 서비스업과 중소기업의 낮은 경쟁력, 인구구조 악화 같은 복합 요인으로 성장이 정체돼 있는 게 현실입니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질적인 경쟁력은 경쟁적 구조에서 나옵니다. 정부는 개별 기업의 경쟁력을 걱정할 게 아니라 경쟁적 구조를 만드는 데 집중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경쟁을 안 할 수 없고 경쟁력도 길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경쟁력 있는 회사는 모두 국제 경쟁을 한 곳 아닙니까.”

▷경쟁을 강조하다 보니 양극화가 확대되는 것 아닌가요.

“경쟁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경쟁을 제대로 안 해서 양극화가 확대된다고 봅니다. 정부가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곳에선 정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경제를 지배합니다. 경쟁이 활성화되면 그런 상태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를 안 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경쟁을 통해 경제가 창의적으로 발전할 뿐 아니라 가장 공평한 경제가 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선 공정한 경쟁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갑질’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그런 일을 하죠. 하지만 공정위의 핵심 역할은 경쟁 자체를 보호하는 것이지 경쟁자를 보호하는 게 아닙니다. 패자를 보호하는 건 누진과세와 복지제도를 통하거나 실패해도 두 번 세 번 시장에 재진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드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중국의 부상으로 한국의 경쟁력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중국 기업의 중간재 생산 능력과 기술력이 향상되면서 ‘홍색(紅色) 공급망’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기업이 장악했던 중간재가 중국산으로 대체되고 있는 겁니다. 중국이 하지 않고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을 갖추는 동시에 과도한 대중(對中) 무역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넥스트 중국’을 찾아야 합니다.”

▷일자리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무역협회가 지난 8월 중소 수출기업의 경쟁력 실태를 조사해 보니 해외에 나가 있는 중소기업 중 49%가 해외 생산 확대를 검토 중이지만 국내에 복귀하려는 업체는 4.7%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선진국보다 높은 규제 장벽과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으면 ‘고용 가뭄’을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서비스 분야는 규제의 양(量)도 문제지만 부처 간 다중 규제로 새로운 융·복합 서비스가 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것부터 고쳐야 합니다.”

■ 김인호는 누구?
공정거래위원장 등 지낸 정통 관료…철저한 시장주의자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은 정통 관료 출신이면서도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행정고시 4회로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을 시작했고 공정거래위원장을 거쳐 김영삼 정부 말기 외환위기 때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1998년 외환위기 책임론에 몰려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로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함께 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하지만 6년간의 재판 끝에 1, 2, 3심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정책적 판단을 처벌할 수 없다고 봤다. 2008년부터 10년 가까이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5년 2월 무역협회장에 취임했다. 저서로 《경쟁이 꽃 피는 경제》, 《시장으로의 귀환》, 《시장원리와 한국의 경제운용》, 《길을 두고, 왜 길 아닌 데로 가나》를 펴냈다.

△1942년 경남 밀양 출생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행정고시 4회 △미국 시러큐스대 행정학 석사 △경제기획원 차관보, 대외경제조정실장 △환경처 차관 △철도청장 △공정거래위원장 △김영삼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 △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 △한국무역협회장

주용석/고경봉 기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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