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보장도 싫다"… 한국 대학 줄줄이 떠나는 젊은 교수들

입력 2017-10-11 17:54 수정 2017-10-12 09:34

지면 지면정보

2017-10-12A1면

성과 평가 없는 연봉…뒤처지는 연구 환경

막내교수들이 연구실 두드리며 점심시간 알리고
선배 세미나 불참 땐 "싸가지 없다"
“머리(교수)부터 허리(박사후연구원), 손발(대학원생과 학부생)에 이르기까지 성한 곳 하나 없는 부상병동이죠.”

서울대의 한 30대 교수가 진단한 국내 대학의 현주소다. 젊은 실력파들이 잇달아 해외 대학으로 떠나고 있다는 얘기다. 과도한 잡무로 연구력마저 퇴보한다는 자성에 정년보장도 마다하는 모습이다.

11일 서울대에 따르면 거시경제분야에서 손꼽히는 이재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42)가 최근 미국 버지니아대로 자리를 옮겼다. 미국경제학회(AEA) 선정 ‘젊은 경제학자상’을 받은 전도유망한 두뇌의 한국 탈출이다. 2013년 미국 럿거스대에서 서울대로 영입된 지 불과 4년 만의 유턴이기도 하다.

이 교수 동료 학자인 이석배 경제학부 교수(46)도 지난해 미 컬럼비아대로 떠났다. 그 역시 미시계량경제학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성과를 거뒀고, 국내 최고 권위의 ‘다산 젊은 경제학자상’을 받은 인재다.

최근 5년(2011~2015년)간 서울대를 떠난 교수는 65명에 달한다. 직전 5년(2006~2010년) 46명에서 42% 급증했다. 젊은 두뇌의 유출은 서울대만의 일이 아니다. 김회광 성균관대 글로벌경영대학원 교수(36)와 손기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38)도 얼마 전 각각 미국과 호주 대학으로 적을 옮겼다. 외국인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서울대로 스카우트된 엘리 박 소렌슨 자유전공학부 교수(38)는 지난해 홍콩중문대를 선택했다. 한국인 입양아 출신으로 2011년 금의환향한 지 5년 만에 모국을 떠나는 선택을 했다.

대학 연구실에서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를 잇는 ‘허리’인 포닥들의 한국 탈출도 뚜렷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떠도는 한국인 포닥만 50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길이 구만리인 젊고 실력 있는 학자들이 ‘정년 보장’이라는 당근도 물리치고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과가 아니라 연공서열에 따라 보수가 결정되고, 학과 간 칸막이로 인해 원하는 연구를 할 수조차 없는 한국 대학의 경직성이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다. 선배 교수가 후배 교수의 ‘조인트를 깔’ 만큼 수직적이고 전근대적인 위계 질서도 소장학자들을 질리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연구 외의 과도한 행정업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국·공립대와 사립대를 불문하고 국내 대학의 보수 체계는 대부분 공무원식 호봉제다.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연구 실적이 뛰어나도 선배 교수보다 많은 연봉을 받기 힘들다. 서울대 교수들의 지난해 평균 연봉 1억600만원 중 성과급은 360여만원으로 3.4%에 불과하다.

학과 간 격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은 공학·경제학·경영학 분야 교수의 연봉이 인문계열의 두세 배에 달한다. 높은 실용성에 대한 보상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일이다. 한 사립대 자연대 교수는 “교수 사회에선 그런 얘기를 꺼냈다간 ‘네가 그렇게 잘났냐’는 핀잔만 듣기 일쑤”라며 “한국을 떠나는 교수들 대부분이 실용학문 연구자인 것도 그런 이유”라고 진단했다.

‘갑질’이라고 불릴 만큼 심각한 수직적 위계질서도 문제로 지적된다. 서울대 사회과학계열 한 학과엔 점심시간이면 막내 교수들이 선배 교수들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며 점심을 권유하는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선배가 주최하는 세미나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당장 “싸가지가 없다”는 말이 돌아온다.

한국을 떠나는 건 교수만이 아니다. 대학 연구실에서 교수와 대학원생 사이를 잇는 ‘허리’인 박사후연구원(포닥)들도 국내에선 설 자리가 없다. 1년 전 서울대에서 공학 박사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포닥을 시작한 김모씨(30)는 “국내에선 교수 자리를 구하기 힘들어 샌프란시스코를 떠도는 한국인 포닥만 500명이 넘는다”고 전했다.
갓 박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의 포닥 시절은 연구자의 생애주기 중 가장 높은 생산성을 발휘하는 시기로 꼽힌다. 1990~2015년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 182명이 해당 연구 결과를 발표한 시점이 평균 39세라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하지만 국내 연구자의 대부분은 해외에서 4~5년간 포닥이나 조교수로 생활한 뒤 마흔이 다 돼서야 귀국한다. 국내 대학 대부분이 임용 기준으로 일정량 이상의 연구실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교수신문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국내 대학 신규임용 교수의 평균 연령은 43.6세다. 김성근 서울대 자연대 학장은 “해외 연구자들은 늦어도 30대 초반이면 교수로 임용돼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반면 한국은 연구력이 가장 왕성할 때 외국 대학에서 보내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돌아오게 된다”고 지적했다.

황정환/박진우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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