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천고마비'엔 유비무환 정신 담겼죠

입력 2017-09-18 09:00 수정 2017-09-18 09:00

지면 지면정보

2017-09-18S14면

중국인들은 가을이 되면 언제 오랑캐가 침입해 올지 모르니 미리 이를 경계해야 했다. 거기서 나온 말이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다. 가을()이 깊고() 변방()의 말()이 살찌는() 시절이니 흉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주는 추분(9월23일)을 앞두고 막바지 늦더위가 이어졌다.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기 때문에 가을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져 산에는 단풍이, 들녘엔 오곡이 무르익어 갈 때다. 그래서 예로부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으로 풍요로운 가을, 활동하기 좋은 시절을 상징하는 말이다.

오랑캐 침략 경계한 ‘추고마비’가 원말

이 말이 지금 같은 뜻으로 쓰이기까지에는 곡절이 있다. 천고마비의 유래는 《한서(漢書)》 ‘흉노전’이다. 중국의 역사는 한마디로 ‘중원(中原)’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사라고 할 수 있다. 중원은 황허 중하류 유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이 풍부해 예로부터 문명이 발달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지역이었다. 지금의 허난성을 중심으로 산둥성, 산시성(陝西省) 일대를 가리킨다. 허난성의 낙양(뤄양), 산시성의 장안(지금의 시안) 같은 천년 고도가 한가운데에 있다.

하지만 중원 북방은 척박한 땅이었다. 말 타고 수렵생활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유목민족의 터전이었다. 그중에 흉노족은 몽골고원에서 활약한 기마민족인데, 사납고 거칠기가 그지없었다. 이들은 넓은 초원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말에게 풀을 먹이며 말을 살찌웠다. 추운 겨울이 닥치기 전 그 힘 좋고 날쌘 말을 타고 중원의 변방으로 쳐들어와 가축과 곡식을 약탈해 갔다. 그 두려움이 오죽 컸으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해 만리장성을 쌓았을 정도였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가을이 되면 언제 오랑캐가 침입해 올지 모르니 미리 이를 경계해야 했다. 거기서 나온 말이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다. 가을(秋)이 깊고(高) 변방(塞)의 말(馬)이 살찌는(肥) 시절이니 흉노의 침입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가르침을 담은 경구였던 셈이다.

세월 흘러도 본래 뜻 잊지 말아야
그런데 추고새마비를 일본에서 받아들이면서 자기네는 섬나라인지라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겁낼 까닭이 없으니 ‘변방 새(塞)’를 빼고 ‘추(秋)’를 ‘천(天)’으로 바꿔 ‘천고마비’라 해 가을철을 수식하는 말로 썼다. 가을의 풍요로움과 맑고 깨끗한 하늘을 가리키는 천고마비가 등장한 것이다.

홍성호 한국경제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작고한 한글학자 정재도 선생은 <한말글연구> 7호(2002년)에서 이런 변화 과정을 설명하면서 “우리네 역시 역사적으로 언제나 북방 오랑캐의 침범을 받아왔는지라 마땅히 ‘추고마비’를 받아들여야 했을 터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일본의 ‘천고마비’를 취해 쓰고 있으니 철딱서니 없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지금은 세월이 바뀌어 이 말의 본래 의미를 굳이 따져 쓸 필요는 없다. 다만 천고마비가 상징하는 가을의 풍요로움 뒤에는 외침(外侵)을 경계하는 유비무환의 자세가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로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요즘 새삼 ‘천고마비’를 들여다보는 까닭이기도 하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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