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17세기 동맥경화

입력 2017-09-13 18:24 수정 2017-09-14 02:57

지면 지면정보

2017-09-14A39면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영국 왕 찰스 2세가 갑자기 쓰러진 것은 1685년 2월2일이었다. 주치의들은 왕의 정맥에서 0.5L의 혈액을 뽑아냈다. 나쁜 피가 병의 근원이라고 생각한 당시로선 최신 치료법이었다. 온갖 약초와 동물 추출물도 구해 먹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피를 하도 많이 뽑아 나중엔 물만 나왔다. 왕은 닷새 뒤 숨졌다.

이보다 75년 앞선 1610년 조선 명의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해부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지만 심장·폐·간·비장·신장 등의 모양까지 정교하게 그렸다. 그러나 ‘한의학의 황금기’로 불린 17세기에도 사인(死因)을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부검을 하더라도 독살이냐 아니냐 정도를 가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제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 연구팀은 17세기 조선 여성 미라의 사망 원인이 ‘죽상동맥경화증에 의한 심혈관 질환’이라고 발표했다. 죽상동맥경화증은 나쁜 콜레스테롤이 쌓여 혈관이 좁아지는 질환이다. 원인은 고탄수화물 식품과 기름진 음식, 운동 부족 등이다. 이 미라의 사인이 처음 밝혀진 것은 2년 전 컴퓨터단층촬영(CT)에서였다. 여성의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고 외출 때도 가마를 타야 했으니 운동 부족까지 겹쳤으리라.

이번 연구에서 주목되는 것은 뇌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이다. 동맥경화증을 일으키는 유전자 10개 중 7개가 미라와 일치했는데, 4개는 세계 공통이고 3개는 아시아인에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동맥경화를 현대병으로 여기기 쉽지만 유전적 원인이 400년 전에 있었다는 게 놀랍다. 2012년 유럽 공동연구팀이 5300년 된 미라 ‘아이스맨’의 동맥경화증을 최초로 규명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의사들은 이번 연구에서 미라의 사인이 유전적 요인 때문인지 생활습관 때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만 뚜렷하지 않은 질병의 병리학적 진단 연구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죽상동맥경화는 30대 후반부터 서서히 진행되지만 60~70대까지는 증상을 알기 어렵다. 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60대 이상 환자가 68%를 차지한다.

의사들이 권하는 예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물성 지방과 자극적인 음식을 줄이고, 채소와 과일을 고루 섭취하며 하루 30분, 1주일에 3일 이상 빠르게 걷거나 유산소 운동을 하라는 것이다. 중성지방 수치를 20~30% 줄이면 혈관이 그만큼 깨끗해진다는 얘기다. 영국 내과 의사 토머스 시드넘도 “인간은 자신의 동맥 나이만큼 늙는다”고 했다.

첨단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도 진짜 사인이 무엇인지는 30%밖에 모른다고 한다. 그나마 규명된 것만이라도 잘 대처하고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명과 인체만큼 신비한 것도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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